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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상철 Mar 12. 2019

출근하는 남자의 집밥일기

매일 하긴 싫지만 먹고싶은 아침


[프롤로그] 남자 인생 최고의 이슈, 요리


내가 요리를 시작한 것이 48세 때다. 그러고 보면 48년을 빚지고 살았다. 타인 때문에 먹고 산 것이다. 어린 시절은 병약했다. 늘 피부병에 시달렸고, 버짐을 달고 살았다. 초등학교 때는 학교에서 엄마 몰래 우유와 빵을 시켜먹었다가 들키곤 했다. 영양실조의 성장기였다. 운동도 못한데다 싫어해서 더욱 허약한 시절이었다.


대학 때는 외갓집에 묻어 살면서 눈칫밥을 먹었다. 제대하고 나서는 자취가 시작됐다. 공장에 다니면서 회사 식당을 주로 이용했다. 휴일에는 부실한 외식이 전부였다. 가끔은 시장에서 반찬을 사다먹곤 했다. 40세에는 처가로 장가가서 장모님께 밥을 얻어먹었다. 그렇게 48년은 임의의 위탁기간이었다. 돌아보면 염치없는 삶이었다. 그때는 그런 것도 몰랐다. 먹고사는 일이 당연한 것인 줄 알았다. 그러면서 자존심만 컸다.


내가 요리에 첫발을 들인 건 학원이었다. 2013년 9월, 6개월 안식휴가를 받았다. 뭘 할까 고민 끝에 요리를 해보기로 했다. 사실 요리를 처음 생각한 건 드라마에서였다. 2012년 가을, 발 복숭아뼈 골절상을 입었다. 발을 헛디뎌 일어난 일이다. 병가 4개월을 꼼짝없이 집에서 보내던 중, kbs 일일드라마 ‘힘내요 미스터김’을 보게 됐다. 남자주인공이 가사도우미였다. 요리를 너무 잘하는 것이었다. 멋 내는 셰프가 아닌 생활 속의 남자여서 더 눈에 들어왔다. 장을 보고 집밥을 만드는 평범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드라마 속 그 남자는 내 롤 모델이 돼버렸다. 하지만 당시에도 요리는 먼 밖 세상이었다. 내가 요리를 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다친 낙심 때문에 그저 좋게만 여겼던 때였다.



결국 학원에서 1개월 한식 수업을 받았다. 노원역 한샘 요리학원이었다. 당시 남자들이 요리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남자들이 막 학원으로 몰려들기 시작하던 때였다. 내가 속한 반이 열 명 정도였는데 남자가 둘이었다. 나 말고 한 남자는 40대 초반으로 보였다. 강습비는 절반이 국고지원이었다. 요리의 ‘요’자도 몰라서 떨리기도 했다. 내가 정말 잘 할 수 있을지 걱정도 됐다.


일단 도전장을 내밀었다. 한번 해보자고 스스로 다짐했다. 학원에 첫날 나갔다. 모든 게 낯설었다. 여자들이 쳐다봤다. 신부 수업하는 여자, 학생, 주부 등 다양했다. 한 달 커리큘럼이 이미 나와 있었다. 식단대로 배우기 시작했다. 앞치마를 두르고 하라는 대로 했다. 따라하면 신기하게도 메뉴가 완성됐다.


모든 건 생소했다. 재료, 양념들, 레시피까지 복잡하기만 했다. 수업시간에 만든 걸 갖고 와서 가족들과 먹었다. 장모님과 아내는 맛있다고 격려해주었다. 그때부터 한순간도 칼을 놓지 않았다. 인터넷을 뒤져 레시피를 모았다. 스마트폰 메모장에 요리법을 내방식대로 정리했다. 지금도 메모장에는 온갖 레시피들이 대기 중이다.


요리는 끝이 없었다. 똑같은 메뉴라도 할 때마다 달랐다. 레시피대로 수없이 반복했다. 계량이 서툴러 몇 번씩 확인하기를 거듭했다. 돌아보면 융통성이 없는 시절이었다. 어느 순간 재료가 눈에 들어오고, 맛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사실 레시피대로만 한다면 거의 실패는 없다. 그래도 내 것은 아니었다. 매일 6시면 기상해 요리를 했다. 7시~7시 30분  아침식사를 맞추기 위해서다. 모시고사는 두 노인네의 식사시간이기도 했다. 이제는 이것도 습관이 돼버렸다.




남자에게 요리는 요리 그 이상이다. 기존의 인식부터 바꾸어 놓는다. 가정에서 남자의 요리 전담은 일종의 혁명이다.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비로소 해방감을 맛본다. 어떤 할머니는 요양원에 가서야 타인이 해주는 밥을 먹었다고 말한다. 요리에서 해방되고 싶다는 주부들을 찾는 일은 별로 어렵지 않다.


내게 요리는 친구이기도 했다. 요리를 앞두면 늘 설렜다. 물론 부담감도 있었다. 이마저도 함께 즐겼던 것 같다. 요리는 늘 교감하는 일이었다. 재료와 대화하고 소스와 씨름을 해야 했다. 요리는 배타성을 거부하고 중용의 미덕도 가르쳤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아야하기 때문이다.


요리는 추억이었다. 미각이 전해주는 기억은 강력하다.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아내가 일하는 병원에 음식도 많이 해다 바쳤다. 아내 동료들에겐 셰프로 통했다. 명절 때 아내 형제들과 나눈 음식들, 무수한 집들이 행사들, 직장 부서 수련회 때 만든 음식들, 인스타그램 친구들에게 단호박스프를 직접 만들어 선물하기까지 모두가 행복한 기억들이다.



요리는 가사의 중심이다. 많은 가사 행위들은 주방을 중심으로 한 요리에 영향을 받는다. 요리는 합목적적인 과정이다. 시간과 계획, 순서에 따른 행위이다. 빨래와 청소, 설거지 등 가사 행위들은 수반돼 행해진다. 다음 단계의 행위들을 순차적으로 해결해 나가기가 쉽다. 요리의 습관은 청소를 하는데도 쉽게 연결시켜 준다. 지금은 장모님이 주로 하시지만, 한때는 내가 바닥 청소까지 담당했다. 그것이 별로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다.


남자의 요리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낸다. 요리는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요리만큼 평범하면서 위대한 일은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과제가 많다. 요리의 능력을 더욱 높이는 일이다. 메뉴에 대한 완결성과 양질의 맛, 가족의 식단과 건강을 책임지는 것들이다. 나는 아내가 자유로워지길 원한다. 나는 아내에게 더욱 맛있는 음식을 제공할 것이다. 그것이 아내에 대한 맹서를 지키는 것이고, 또 나를 사랑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요리는 내 삶의 최고의 기술이다. 요리는 내 인생 최대의 이슈다. 요리를 향한 욕구는 언제나 진행형이다. 내가 원하는 건 셰프가 아니다. 그저 요리가 좋아서다.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다. 인스타그램은 요리의 거점이 돼줬다. 요리는 이제 자유를 향해 나아간다. 매일 최선의 레시피를 향해 달려간다. 요리는 나를 성장시키는 기제다. 이미 요리는 내게 많은 선물을 준 셈이다.


주방에 처음 서게 해준 아내와 장모님, 요리를 처음 가르쳐준 한솔요리학원 선생께 감사를 드린다. 무엇보다 인스타그램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인친들은 끊임없이 성원을 보내준 멘토 부대다. 그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요리는 만인의 축복이다. 단 하나의 레시피에 최선을 다하느라 파닥거린 숱한 나날에 경배를.


※ 요리 음식 사진들은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어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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