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부모를 부양하면서 함께 늙어가는 노후
타인은 나의 거울이다.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건,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사람은 예민한 동물이다. 자유를 끝없이 추구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자유가 무제한 허락되진 않는다. 혼자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혼자서 태어날 수도 없다. 자유를 얻어 사는 셈이다. 혼자서 자유롭다고 느끼지만, 이면에는 누군가의 희생이 존재한다. 부모가 됐건, 배우자가 됐건 어쨌든 타인이 있는 이유다.
2005년 5월 결혼하면서 처부모를 모시게 됐다. 벌써 14년이 흘렀다. 장인어른은 80대 중반에 들어섰고, 장모님도 내년이면 팔순이다. 노년의 삶은 비루하다. 장인어른은 아침을 드신 후 어디론가 사라진다. 전철을 타고 전국을 누빈다. 장모님은 시내에서 주로 친구들과 어울린다. 복지관은 이미 주요한 거점이 됐다. 장인어른은 바둑, 장기로 일관하고, 장모님은 종교와 운동, 사교로 시간을 보낸다.
두 분은 늘 의사소통에 문제를 일으킨다. 인생의 경륜은 온데간데없다. 50년 이상을 살아왔지만 아직도 소통에 서투르다. 한때는 심각한 상태까지 간 적도 있었다. 장인어른은 당뇨병을 오랫동안 갖고 있어 말이 어눌하다. 장모님은 비위가 약해 밀가루 음식은 못 드신다. 채식 위주의 식생활을 한다. 장모님은 척추에, 장인어른은 다리에 인공 기구를 장착한 채 생활을 한다. 약은 늘 한 움큼씩 드시고, 병원 진료는 일상화됐다.
노년은 남녀 간 역할에 극명한 차이를 드러낸다. 장인어른은 스마트폰을 모르고, 장모님은 이제 카톡을 조금 이용하신다. 장인어른은 집에서 별로 할 일이 없다. 장모님은 가사를 하시기 때문에 늘 바쁘다. 남자의 노년은 집이 반갑지 않다. 여자의 노년도 집이 달갑지 않다. 남자는 할 일이 없어서, 여자는 여전히 할 일이 많아서다. 장모님은 친구들과 네트워크가 그래도 활발한 편이다.
노년의 삶은 느리고 무르다. 생체시계는 점점 앞으로 당겨지고, 달력 일정은 점점 뒤로 밀려난다. 가스활명수는 늘 비치돼야 하고, 두유와 꿀, 설탕의 섭취량은 증가된다. 누룽지와 보리쌀이 종종 필요하고, 쌀밥은 주식이 된 지 오래다. 소화력이 떨어지고, 미각이 둔화된 탓이다. 우리 집은 밥통이 두 개다. 부모님은 쌀밥, 우리 부부는 현미밥 전용의 압력밥솥을 쓴다. 현미밥을 추천해도 드실 생각이 아예 없다.
부모세대의 모습은 곧 나의 미래다. 삶의 교훈을 얻는 이유다. 나와 아내의 나이도 벌써 오십 대 중반이다. 적어도 의사소통 방식은 늘 고민거리다. 부모세대는 문맹에 가깝고, 문명에는 멀다. 휴대폰은 통화용이고, 문자용은 불가다. 아날로그에 익숙하고 디지털은 불편하다. 부모세대는 디지털 감성을 모른다. 디지털은 관계의 속도와 확장성에 매우 유용하다. 노년에 새로운 설계가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