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한 적 없는데요?
한국인, 인도인을 때리다
주재원으로 근무하던 한국인이 인도인을 때리는 일이 있었다. 그 한국인은 성격이 다혈질이기는 해도 사람을 때릴 정도로 문제가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일도 잘하고 회사 내에서도 능력을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과는 무난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하지만 인도 직원을 대할 때는 달랐다. 소리를 지르면서 비난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내용을 들어보면 자신이 어떤 일을 시켰는데, 일은 하지 않았으면서, 핑계만 되거나 거짓말을 자주 한다는 이유였다. 자주 화를 내다가 결국에는 폭력을 쓴 것이다. 문제는 이런 폭력사건이 한국인과 인도인 사이에서 가끔 발생하는 점이다. 언어폭력은 부지기수로 일어난다.
한국인과 인도인의 차이점
한국인이 일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무서울 때가 있다. 저녁 6시에 처리할 일이 생기면 야근을 해서라도 처리한다. 모르는 일이 있으면 여기저기 물어서라도 처리한다. 몸이 아파도 일이 있으면 일을 먼저다. 가족에게 사고가 나도 기본적인 일을 처리해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한 후 가족에게 간다.
하지만 인도인은 그렇지 않다. 아니 한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다른 나라 사람은 그렇게 일하지 않는다. 저녁 6시에 처리할 일이 생기면, 당연히 퇴근한다. 모르는 일이 있으면 하지 않는다. 대신 모르는 일이라서 못했다고 얘기한다. 몸이 아프면 쉰다. 가족에게 사고가 나면 바로 달려간다.
생각해보면 몸이 아픈데 일하러 가는 것이 이상한 일 아닌가? 연차란 그러라고 있는 것인데도 연차 쓸 때 눈치를 보는 것이 이상한 일 아닐까? 가족이 사고가 났는데 일하고 있는 게 더 이상한 일 아닐까?
예스의 의미
한국 주재원이 인도 직원에 대해 가장 많이 얘기하는 불만은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분명 업무를 지시할 때는 ‘예스 Yes’라고 대답했지만 정해진 시점이 되면 원하는 결과물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왜 못했냐?’라고 물어보면 못한 이유를 댄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자신은 일하려고 했지만, 상대방이 하지 않았거나, 다른 일을 하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못했거나 하는 이유를 말한다. 어떨 때는 생각과는 다른 결과물을 가지고 와서 자신이 생각한 대로 해서 결과물이 바뀐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코 자신이 잘못했다고 말하는 경우는 없다. 그럼 한국인은 다시 물어본다. 업무를 지시할 때는 왜 ‘예스’라고 대답했는지 물어보면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 ‘예스’라고 대답한 것이고, 막상 일을 해보니 다른 사람이 잘 따라주지 않거나 불가피한 사건이 발생해서 못한 것이라고 얘기한다.
한국인은 인도인의 설명이 핑계를 대는 것이라 여긴다. 그래서 화를 낸다. 인도인을 때린 한국 주재원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한국인으로서는 이런 모습이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한국에서 업무 지시를 하면 항상 대부분 정해진 시점에 결과물이 나왔고, 문제가 생기면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서 해결했던 사람들과 일을 했었는데 인도인과 일을 하니 한국처럼 일하는 사람이 없고, 결과도 잘 나오지 않으니 화를 내는 것이다.
하지만 인도인이 생각하는 사고 체계는 한국인과는 다르다. ‘예 Yes’라는 것은 업무 지시를 이해했으며, 내가 그 일을 해보겠다는 의미에 가깝다. 일하다 맞닥뜨리는 어쩔 수 없는 장애물로 일이 진행이 안 되면, 그것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능력 밖의 것이기라 생각한다. 인도인이 생각하는 ‘예 Yes’라는 뜻에는 반드시 결과물을 가져와야 한다는 성과적 개념은 빠져있다. 일단 일을 시작해보겠다는 의미에 가깝다는 걸 알아야 한다.
인도인이 보기에도 한국인은 참 이상할 것이다. 한국인이 인도인을 볼 때 이상한 것처럼 말이다. 한국인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오면 무조건 화를 낸다고 생각할 것이다. 인도인이 보기에는 한국인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탓을 하거나 환경 탓을 한다고 보일 것이다. 그래서 이유도 없이 일하는 사람에게 화를 낸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슬쩍 인도인 몇 명에게 물어봤다. “한국 사람 화 많이 내지?” 인도인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일은 잘하는데, 항상 화가 나 있는 사람들인 것 같다.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우리가 인도인이 거짓말한다고 이해 못하는 것처럼 인도인도 화내는 한국인을 이해하지 못한다. 모든 문제가 그렇듯, 결국 문제의 원인은 양방과실일 수밖에 없다.
화부터 내는 한국인
한 번은 인도인이 일이 틀어진 것에 대해 정말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었다. 두 번째 주재원 파견 시, 현지 직원에게 일을 시키고 제대로 결과물이 나오지 않은 적이 생겼다. 그래서 마주 앉아서 정말 끝까지 물어봤다. 가장 궁금했던 점은 거짓 핑계를 대는지였다. 그리고 두 번째 궁금했던 점은 일이 틀어진 것에 대해 미안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였다. 화를 내거나 추궁하지 않고 1시간 넘게 토론하듯 대화를 했다. 그리고 알게 된 것은 자신은 하나도 잘못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점이었다. 그 직원이 거짓말을 너무 잘하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한 시간 넘는 대화 속에서 그 직원이 자신의 잘못으로 일을 못 했다고 생각할만한 어떠한 근거도 찾지 못했다. 자신은 잘못이 없으니 미안하지 않은 것이다. 여기서 오해가 발생한다. 한국인이 이런 모습을 뻔뻔하다고 생각하고 인도인은 이유 없이 화를 낸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세상에는 새로운 정의가 필요하다
누구나 세상을 ‘정의’하며 살아간다. ‘정의’가 많다는 것은 생각을 덜어주고 자동화를 만드는 것이고, 자동화는 에너지 소모를 줄여준다. 인류는 ‘정의’를 통해 습관화된 행동을 만들어 다른 곳에 에너지를 쓸 수 있도록 진화했다. 하지만 이런 ‘정의’는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서는 오히려 문제가 되기도 한다다. 지금까지 삶의 경험을 통해 내린 ‘정의’를 다른 환경에서도 계속해서 고집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예 Yes’에 대한 한국인의 정의는 인도에서는 맞지 않을 수 있다. 그뿐 아니라 다른 정의는 인도에서는 맞지 않을 수 있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정의를 지키려는 이유는 가치관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요한 정의 몇 가지는 자신이 서 있도록 지탱해 주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 그런 정의를 허무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이 무너지는 생각을 생각될 수도 있다.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과거에서 가져온 정의를 고수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환경에 맞는 새로운 정의를 만들 것인지는 잘 생각해봐야 하는 문제다. 내가 확신하는 것,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때로는 단 몇 번의 경험과 나의 확증편향이 빚어낸 환상일 경우일 수도 있다.
확신은 때로는 화장실 거울에 비친 내가 잘 생겨 보이는 찰나가 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새로운 환경에 들어선다면 확신을 버려야 한다. 정의한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내가 쌓아 올린 정의 중에 시공간을 초월한 정의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런 것은 진리라고 부른다. 내 정의가 진리가 아니라면, 새로운 세상에 들어갈 때 짐을 내려놓듯이 모두 내려놓고 들어가야 한다. 정의를 고수하기보다는 세상의 흐름에 몸을 맡길 필요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