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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피스토 Mar 17. 2022

찬란한 한때


식물은 위를 보고 자란다. 햇볕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식물도 있다. 할미꽃이다. 식물원에서 처음으로 할미꽃을 보았다. 할미꽃은 아래로 자라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아래를 보고 꽃을 피우고 있었다. 할미꽃이 아래로 꽃 피는 데는 이유가 있다. 꽃가루를 물에 젖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줄기를 구부리면 꽃받침이 우산 역할을 하기 때문에 스스로 등을 휨으로써 후대를 이을 수 있는 것이다. 


흰 털로 덮인 꽃 모양이 노인의 풀어헤친 백발을 닮아 ‘할미’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이 식물은 다만 생존을 위해 유니크한 디자인을 선택했을 뿐이다. 


할미꽃의 의미는 오히려 영어명에서 빛을 발한다. 할미꽃은 영어로 ‘파사크 플라워(Pasque flower)’다. ‘파사크’는 ‘지나가다’ ‘뛰어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페사흐(pasakh)’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페사흐’는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이집트를 무사히 탈출한 것을 기념하는 유월절(Passover)의 어원이 된다. 


할미꽃은, 유월절과 훗날 유월절 기간에 예수가 부활한 시기(3~4월 경)에 피기 때문에 ‘파사크 플라워’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결국 할미꽃은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는 함민복 시인의 시처럼, 태생부터 생과 사의 경계에서 꽃 피고 있었던 것이다.


식물에게 가장 찬란한 한때는 꽃을 피우는 순간이다. 할미꽃은 후대를 지켜내기 위해 스스로 등을 굽어 생의 ‘가장 찬란한 한때’를 넘어가는(pass over) 중이었다. 절정의 순간, 가장 낮은 자세로 씨앗을 품고 가장 찬란하게 백발로 흩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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