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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양이쌤 Jan 19. 2021

머리카락

당신의 욕망은 무엇입니까

*갑자기 떠오른 장면 하나를 이야기로 만든 초초초 짧은 소설입니다. 

소설 공부한 적 없어서 마음대로 썼어요:)






선미는 자신의 머리카락이 정말 싫었다. 곱슬머리라도 한 방향으로만 굵게 굽슬굽슬 굽으면 귀엽기나 하지. 이 방향 저 방향 제멋대로 꼬부라지니 아무리 빗어도 정리가 되지 않았다. 손가락에 힘이 생겨 드라이기를 잡을 수 있게 된 뒤로는 드라이가 제대로 먹히지 않으면 학교조차 가지 않았다. 너무 심하게 드라이를 해 머리카락이 타기도 했다. 그런 날은 머리카락 전부를 태워버리고 싶었다. 특히 비 오는 날 가르마 주변 잔머리가 미어캣처럼 벌떡벌떡 일어서는 바람에 젤을 떡칠해 고정하는 것으로 모자라 10분마다 손거울을 꺼내 잔머리 하나하나를 다시 짓눌러 놓곤 했다.  

    

가장 싫은 건 이마라인을 따라 자란 짧고 굵은 잔털들이다. 목욕탕 갔을 때 슬쩍슬쩍 본 아줌마들의 그것을 똑 닮았다는 생각이 든 날부터는 거울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 이 잔털은 뽑지 않으면 드라이로도 젤로도 잠재울 수 없었다. 거울을 노려보며 잔털을 뽑아댈 때면 눈알이 튀어나올 듯 아팠다. 처음엔 말리던 친구들도 선미의 눈 속 광기를 본 뒤로 슬슬 피했다. 그 잔털이 너무나 흉측해 거울 속 자신을 혐오스럽게 바라보던 어느 날, 선미는 눈썹을 다듬는 면도칼로 이마라인을 깨끗이 밀어냈다. 숨겨져 있던 하얀 이마가 단정하게 드러난 얼굴을 보며, 선미는 오랜만에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한참 웃었다. 

     

그러나 손에 잘 잡히지 않아 뽑기 힘든 잔머리만큼 행복한 시간은 짧았다. 잔털은 또 짧고 굵게, 구불구불 자라나기 시작했고, 하필이면 이마 한가운데로만 제법 자리를 잡고 자라 나와 갈매기 라인이 만들어졌다. 선미는 마이콜이라는 별명 말고도 원숭이라는 별명을 새로 얻게 되었다.     


지은의 머리카락은 아름다웠다. 지은이 학교에 도착해 자리 앉기 전, 두 손을 머리카락 아래로 넣어 겨울 코트 속으로 들어간 머리채를 단번에 빼내는 모습은 샴푸 광고의 한 장면이었다. 지은은 항상 선미에게 머리를 묶어달라고 했다. 한손으로 잡기도 버거울 만큼 숱이 많은 지은의 머리카락을 쥐고 있을 때면 선미는 아찔함과 수치심을 함께 느껴야만 했다. 모든 아이가 지은의 길고 찰랑대는 머리칼을 부러워했고, 옆 남중에서는 지은을 ‘Y여중의 전지현’이라 불렀다. 지은 또한 태어나서 한 번도 잘라본 적 없다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랑스러워했고, 그것이 권력임을 잘 알고 있었다. 지은은 선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내 푸들’이라고 부르곤 했다. 여왕과 푸들.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15살이 된 그해 수학여행에서 선미는 인생을 뒤바꿀 결심을 하게 된다. 지은의 머리를 묶어 줄 때마다 강렬하게 원했던 그 일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처음 술을 마셔본 아이들은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고 지은은 조용히 코까지 골고 있었다. 가방 깊숙이 숨겨뒀던 가위를 꺼낸 선미는 조심스럽게 지은의 머리카락을 한 손에 움켜쥐고 싹둑싹둑 자르기 시작했다. 천천히 움직이는 가윗날이 달빛에 번쩍였다. 아마 선미의 눈빛도 그러했을 것이다. 조용한 방에 낮게 울리는 가위 소리에 선미는 아랫배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침이 되고 아이들의 비명 소리에 선미는 잠이 깼다. 웅성거리며 한곳에 모여선 아이들 가운데 잠이 덜 깬 어리둥절한 표정의 지은이 있었고, 몇몇 아이들은 울면서 선생님께 달려갔다. 선미는 지은을 일으켜 세워 화장실로 데려가 거울을 보여주었다. 뜯겨나간 듯 잘린 머리칼을 보며 지은은 아무 말이 없었다. 초점이 흐려진 눈으로 그저 멍하니 거울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선생님은 누구 짓이냐 호통 쳤지만,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증거를 찾는다며, 함께 방을 썼던 아이들의 가방 검사가 시작됐다. 은따였던 경희의 가방에서 가위와 머리카락이 나왔다. 경희는 손사래를 치며 자기가 한 짓이 아니라 소리쳤지만 아무도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수학여행이 끝나고 경희도 지은도 더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경희는 강제전학을 갔고, 지은은 아프다고 했다. 지은의 상태에 대해서는 소문만 무성했다. 경희의 전학도 지은의 병도 선미의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단 하나의 소문은 선미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지은의 옆집에 사는 아이 말로는 지은의 머리카락이 다시 자라기는커녕 한 올 한 올 빠지더니 뭉텅이로 빠지기 시작해 이제는 거의 대머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보다 더 이상한 일은 선미에게 일어났다. 지저분했던 곱슬머리가 뒷머리부터 차분해지기 시작하더니, 점점 찰랑거리는 생머리로 변해갔다. 비 오는 날마다 등교를 고민하게 했던 잔머리가 곱게 길어 나오고, 원숭이 같던 이마라인이 점차 희미해져, 반듯하고 깨끗한 라인이 생겨났다. 고무줄을 여러 번 돌려 묶어야 할 만큼 적었던 머리숱도 두 손으로 잡아 묶기 버거울 만큼 많아졌다. 손가락 끝을 세워 머릿속을 긁을 때 느껴지는 풍성함에 가슴 터질 듯한 희열이 느껴졌다. 졸업할 때쯤 선미는 허리까지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를 갖게 되었고 ‘Y여중의 전지현’이라는 지은의 별명을 물려받게 되었다.     



*     



“야, 쟤야 쟤! 쟤가 걔야. 진짜 머릿결 장난 아닌데.”

“머릿결만 전지현이면 뭐하냐. 몸매가 아닌데. 다리가 너무 짧고 굵은데? 몸매는 역시 수아지. 걔 머리는 남자같이 자르고 다녀도 몸매가 모델급이야. 걔 다리 진짜 장난 아니잖아.”     


여왕이 되기 위해서는 머리카락만으로 부족하다는 것을 선미는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수아의 길고 매끈한 종아리. 탄력 있는 허벅지는 치마를 짧게 접어 입는 게 유행이던 그때 가장 빛나는 권력이었다. 어느 새 선미는 수아의 뒤만 쫓게 되었다. 수아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오직 한 가지 생각에만 사로잡혔다. 다리. 저 다리만 가진다면 세상 부러울 게 없을 텐데, 내가 수아 몸매면 모든 사람이 나만 바라볼 텐데.    

  

달려가던 수아가 갑자기 계단 앞에 멈춰 섰고, 속도를 늦출 수 없었던 선미는 수아와 부딪혔다. 계단으로 굴러 떨어진 수아는 바닥에 누워 기이하게 꼬인 다리를 붙잡고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수아는 심하게 부서진 다리 때문에 거의 반년을 학교에 나오지 못했다. 겨울 방학이 지나고 학년이 바뀌고 나서야 겨우 뼈가 붙은 수아는 20kg이 불어 거대해진 덩치로 학교로 돌아왔다. 수아가 학교에 나오지 않는 동안 선미는 수아 만큼 키가 자랐다. 수아가 살이 찐 만큼 선미는 살이 빠졌다. 그리고 ‘S고 여신’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다.     


 

*     



갑작스러운 호르몬 변화 때문이었을까? 선미에게 다시금 시련이 왔다. 여드름이었다. 열여덟, 늦은 나이에 입 주변부터 시작된 여드름은 볼, 코, 이마를 거쳐 두피, 등까지 퍼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아름다운 머릿결과 몸매를 가지고 있었지만, 얼굴에 난 여드름에서 고름까지 나기 시작하자 반 아이들의 표정이 바뀌기 시작했다. 가끔 남자애들 사이에서 ‘괴물’ 어쩌고 하는 소리도 들리고, 단짝들도 함께 점심 먹기를 꺼렸다.     

매일 밤 여드름을 짜대고 좋다는 약은 모두 사서 바르고 먹어봤지만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선미는 좌절했다. 지금까지 얼마나 힘들게 이 미모를 지켜왔던가. 예쁠 땐 모두가 나만 바라보고 내 말만 따랐는데 한순간에 이렇게 버려질 수 있는 건가. 피고름이 매달린 얼굴을 저주스럽게 바라보고 있던 그때였다. 거울 속 괴물이 선미에게 속삭였다. 곱슬머리에 짧고 굵은 다리를 가졌던 자신이 전지현을 닮았다는 말을 듣게 될 만큼 변했다. 지은과 수아의 아름다움이 몰락했을 때 자신은 피어올랐다. 이건 혹시 지은과 수아의 아름다움을 내가 빼앗았기 때문이 아닐까? 엄마, 아빠와도 전혀 닮지 않았잖아. 유전의 법칙마저 깨뜨릴 만한 강력한 마법이 있었던 건 아닐까? 그렇다면 그 마법의 주문이 뭐였더라?     


다음 날 선미는 그 마법의 주문을 한 번 더 외워보기로 한다. 아니 확인해보기로 한다. 만약 이 주문이 통한다면 그녀는 절대 권력을 얻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위험하지만 가치가 있는 실험이라 생각했다. 선미는 유일하게 자신의 곁에 남아있던 남자친구 동호를 불렀다. 투명하리만치 하얗고 깨끗한 피부를 가져 ‘백설 공주’란 별명을 갖고 있던 옆 반 서연이의 얼굴에 상처를 내 달라고 동호에게 부탁했다. 서연이 자기를 욕하고, 이상한 소문을 퍼트리고 있다고. 자기 피부와 내 피부를 비교하면서 날 비웃는다고 울면서 거짓말을 했다. 그날 밤 동호는 다른 학교 후배들을 시켜 서연을 폭행하고 돈을 뺏은 뒤, 서연의 이마와 볼에 담배 자국을 남겼다.      


다음 날부터 마법은 진실이었음이 증명되었다. 담배 자국을 냈던 이마와 볼부터 여드름이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한 달 만에 선미는 아기 피부로 돌아갔다. 친구들은 앞다투어 비결을 물었고, 선미는 아주 비싼 피부과를 다닌다고 말했다. 선미는 이제 더 이상의 고통이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     



주말이면 거리로 나갔다. 약속 장소에 서 있기만 해도 명함 서너 장은 받았다. 헌팅은 귀찮을 정도였다. 선미는 방송연예과에 진학했고, 입학과 동시에 주목받았다. 매일 약속이 생겼고, 매일 술자리가 있었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알아주고 숭배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선미는 취해갔다. 고급 클럽에도 드나들었다. 연예인과 잠깐 잠깐 만나기도 했고, 재벌 3세라 불리는 남자들의 추근거림에도 익숙해졌다. 와인의 이름을 외우기 시작했고, 그 와인과 어울리는 뜻도 모르는 안주를 주문할 때도 발음이 어색하지 않았다.      


어느 날 숙취로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난 선미는 여느 때처럼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오후 4시. 전화도, 문자도, 카톡도 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서서히 약속이 줄어들고 헌팅을 받은 지는 꽤 오래되었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벌떡 일어나 거울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선미는 깨닫는다. 먹고 마시는 생활 때문에 살이 너무 많이 쪘다는 걸.      


그러나 선미는 크게 걱정스럽지 않았다. 마법의 주문을 알고 있으니까. 날씬한 여자를 찾아서 살을 조금 찌르거나 베어버리면 그만이지. 그런데 곧 연예인 될지도 모르는데 좀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선미는 헤어지고 나서도 여전히 자신을 귀찮게 따라다니던 동호에게 연락했다. 원하는 걸 해 줄 테니 부탁 하나 들어달라고. 얼굴은 별로지만 ‘베이글녀’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같은 과 모델지망생의 가슴과 배, 허벅지를 살짝 찔러달라고 말했다.     

 

동호는 문제없이 일을 해냈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선미는 예전의 몸매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예전과 달라진 점은 가슴이 더 커졌다는 것. D엔터테인먼트의 연습생이 된 것으로 마법의 효과는 절정에 치달았다. 동호는 선미를 원했다. 처음에는 몸만 원했는데, 점점 갈수록 요구 사항이 달라졌다. 건달처럼 살던 동호는 선미의 몸이 지겨워지자 돈을 주지 않으면 경찰에 자수 하겠다고 협박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십만 원, 이십 만원 푼돈이었지만 갈수록 액수가 커졌다. 돈을 주지 않으면 때리기 일쑤였고, 멍 때문에 알바로 하던 화보 촬영을 못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은에게 빼앗은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서연에게 뺏은 도자기 피부를 후려쳤다. 불법 도박에 빠져 하루에 몇 백을 잃고 왔던 날엔 수아에게 빼앗은 다리에 금이 갔다. 선미는 모든 걸 걸고 훔쳐왔던 것들을 다시 빼앗기게 될까 두려워졌다. 다시 훔치려면 또 위험한 도박을 해야 하지 않는가. 이제 곧 데뷔해야 하는데 시간도 부족해. 동호를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혹시 동호가 가진 무언가가 자신에게 옮겨오지 않을까 무서웠다.     


금이 간 다리에 깁스 한 채 선미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래. 돈만 있으면 돼. 동호가 쓰다 지칠 만큼 돈을 주면 되잖아. 그걸 다 주고 동호에게서 도망치면 돼. 아니면 경호원을 고용할 수도 있잖아. 돈이야. 돈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 그렇지. 연습생 중에 이사 딸이 있었어. 걔는 예쁘지도 않은데 연습생이 됐잖아. 다 부모가 받쳐 준 거지. 그 애 부모를 다치게 하면 되지 않을까? 사고를 내 볼까? 아니면 그 애 집에 불을 질러 볼까? 걔도 같이 죽여야 하나? 요즘엔 청부 살인도 비밀 보장이 다 된다고 하잖아.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선미의 머릿속에서 연습생과 그 부모는 몇 번이고 다양한 방식으로 끊임없이 죽어갔고, 그 방법은 갈수록 잔인해졌다. 선미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온다.     


한참 동안 상상 살인을 즐기다 입술이 바짝 말라 혀를 내둘러 침을 묻히려는데, 입술에 뭔가 붙어있다. 걸리적거려 손으로 더듬어 보니 머리카락 한 올이다. 엄지와 검지로 머리카락을 집어 쓱 걷어내려는데 목구멍이 간질거린다. 잡아당기니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부터 머리카락이 올라오는 게 느껴진다. 내가 머리카락을 삼켰었나? 두 손을 번갈아가며 계속해서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데, 끝도 없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한 가닥인 줄 알았는데 두 가닥, 세 가닥이 되고 나중엔 한 뭉텅이가 되어 쏟아져 나온다. 역겨움이 올라와 토악질하면 꿀럭꿀럭 더 많은 머리카락이 나온다. 머리카락은 이제 두 손으로 잡기 버거운 양이 되었다. 이 많은 머리카락이 도대체 어떻게 내 안에 들어간 거지? 숨이 막히고, 눈이 빠질 것처럼 아파온다. 스산한 달빛 아래 지은의 머리카락을 서걱 서걱 자르던 그날 밤이 떠오른다. 스윽 스윽 커거걱 머리카락이 목구멍을 스치는 기이한 감각에 묘한 쾌락을 느끼면서, 선미는 어지러움 속에서도 머리카락 빼내는 걸 멈출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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