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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양이쌤 Apr 05. 2021

미숫가루

그 미소의 의미는

*갑자기 떠오른 장면 하나를 이야기로 만든 초초초 짧은 소설입니다.

소설 공부한 적 없어서 마음대로 썼어요:)




일곱 살이었던가. 여덟 살이었던가. 푹푹 찌는 한여름이었다. 댓마루에서 아빠 무릎에 모로 누워 반쯤 잠들어 있었다. 아빠는 내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으며 연신 부채질을 해주셨다. 선풍기가 내게 고정되어 있었기에 그리 덥지도 않았는데 아빠는 부채질을 멈추지 않았다. 아빠의 부채질이 기분 좋은 잠을 불러왔다. 그때 엄마는 땀을 뻘뻘 흘리며 걸레질을 하고 계셨다. 우리 집엔 선풍기가 한 대밖에 없었다.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아빠의 손이 귓불을 타고 목덜미로 내려오려 할 때 엄마가 말씀하셨다.

“여보, 더우시죠? 미숫가루 한잔 탈까요?”

“거 좋지. 우리 연이 것도.”

“연이는 아까 한잔 마셨는데....”

“연아, 어서 일어나. 미숫가루 먹자.”     


엄마가 타주신 미숫가루는 평소보다 훨씬 달았던 것 같다. 엄마는 단 걸 싫어하시는 아빠 때문에 음식에 설탕을 거의 쓰지 않으셨다. 가끔 동네 아주머니들이 주시는 사탕이 아니면 단 걸 먹기 힘들었다. 아빠는 유독 치아건강을 강조하셨다. 손수 칫솔질도 시켜주셨고, 이가 썩지 않아야 한다고, 그래야 사랑받는 여자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아이에게 단맛은 갈증이었다. 아빠 몰래 엄마에게 단 걸 먹고 싶다고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렇게 단호했던 엄마가 이토록 단 미숫가루를 주시다니. 나는 아빠에게 들킬까 단숨에 마셨다.      


아빠는 늘 다정했다. 엄마에겐 차가웠지만 날 대할 때는 늘 웃음이 가득했다. 아빠가 일찍 퇴근하는 날이면 목욕도 함께 했다. 엄마와 달리 때를 빡빡 밀지 않아 좋았다. 부드러운 수건으로 온몸을 구석구석 닦아주시며 “우리 연이는 이렇게 조그마해서 너무 예뻐.”하셨다. 그 말을 너무 자주 해서, 예전엔 엄마 이가 삐뚤빼뚤해서 미워하나 했는데 사실은 엄마가 뚱뚱하고 키가 커서 그렇게 미워하시는가보다 생각하게 됐다.      


아빠는 술을 마시면 내 방에 와서 자곤 하셨는데 10살 무렵부턴 엄마가 아빠를 말리기 시작했다. 방문 밖에서 아빠를 애타게 부르던 엄마의 목소리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여보, 애도 이제 많이 컸는데 딸 방에 그렇게 들어가면 어떡해요. 어서 나오세요.”

“아빠가 딸 방에 들어가지도 못해! 왜 이리 말이 많아!”

실랑이가 길어지면 아빠는 화가 나서 뛰쳐나가 엄마를 때렸다. 나는 아빠를 화나게 하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고, 그렇다고 나가버린 아빠가 미워 펑펑 울었다.      


그즈음이었다. 엄마가 내 음식에 설탕을 듬뿍 넣어주기 시작한 게. 아빠 몰래 콜라와 초콜릿도 사 주셨다. 내 이는 금세 썩었고, 체중은 불기 시작했다. 13살에 생리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해 아빠가 돌아가셨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에 엄마는 본격적으로 나를 먹이기 시작했다. 매끼 정성스레 식탁을 차렸고, 늘 기름지고 단 음식들이 가득했다. 한번 커진 위장은 줄어들지 않았다. 엄마를 닮아 키가 자랐고, 덩치가 너무 커져 친구들이 나를 피했다. 왕따를 당했고, ‘자이언트 돼지’라는 별명을 얻은 후 학교에 더는 나가지 않았다. 나날이 먹고 뚱뚱해진 나는 걷기조차 힘들었고, 결국 병원에 입원했다. 화장실에 가기조차 힘들만큼 살찐 나는 기저귀를 차고 누워서 똥을 싸게 됐다. 내 인생이 왜 이렇게 망가진 건가.     


엄마 때문이다. 엄마는 나를 질투했다. 아빠의 사랑을 내게 빼앗기자 나에게 복수하기 위해 나를 돼지처럼 사육했다. 아, 그러고 보니 기억이 난다. 아빠가 돌아가시던 날 저녁식사를 끝내고 우리는 여느 때처럼 미숫가루를 마셨다. 아빠 몰래 내 컵에 하얀 설탕을 잔뜩 타면서 나를 보고 웃으셨지. 그리고 아빠 컵에도 설탕을 넣었다. 

“아빤 단 거 싫어하시잖아.”

“쉿, 이건 설탕 아냐.”하며 엄마는 그 삐뚤빼뚤한 이를 다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손이 벌벌 떨렸다. 엄마는 아빠를 죽이고, 이제는 나를 서서히 죽이려 한다. 이렇게 살 바엔 엄마를 죽이고 아빠 곁으로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엄마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겨우 몸을 움직여 선반에 놓인 과도를 집어 베개 밑에 숨겼다. 잠시 후 엄마가 돌아왔다. 나는 잠든 척했다. 그런데 엄마 말고 한 사람이 함께 들어왔다.


“여기 우리 딸이에요.”

“어머, 어떡해요. 이렇게 말라서.”

뭐. 나는 귀를 의심했다. 내가 말랐다고? 

“거식증이라고 듣긴 했지만 실제 환자를 보는 건 처음이라 놀랐네요. 얼마나 걱정되세요.”

“차라리 몸 어디가 안 좋다면 수술이라도 하겠지만 이건 정신적인 거라니 더 힘드네요.”

“오래됐다면서요?”

“초등학교 때부터 조금씩 먹지 않기 시작하더니 지 아빠 죽고 난 후부터는 아예 안 먹어요. 너무 안 먹어서 쓰러질 때마다 내가 설탕물 떠 먹여 정신 차리게 만들고 그랬어요. 이제는 도저히 안 돼서 호스로 먹이면서 하루하루 연명하고 있네요.”

“아휴, 빨리 마음을 고쳐먹어야 할 텐데.”

“병원비가 감당이 안 돼서 이제 내가 일을 해야 해서요. 아무쪼록 잘 부탁드려요.”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저 여자가 뭐라고 하는 거야. 아빠를 죽인 주제에. 입을 막아버리고 싶었지만 움직일 힘이 없었다. 숨이 턱턱 차올랐다.

“아이고 왜 이러는 거예요? 힘든가 봐요.”

“숨 쉬기 힘들 때 이래요. 이럴 땐 살짝 일으켜주면 편해 해요.”     


엄마와 그 여자는 나를 붙잡아 일으켰다. 호흡이 차차 편해졌다. 나는 엄마룰 노려보려고 고개를 들었다. 그때 정면에 거울이 보였다. 거울 속에 왠지 낯익은 여자 하나가 보였다. 해골처럼 말라 비틀어졌고, 피부는 거무죽죽한. 이는 반쯤 빠진 병원복을 입은 늙은 여자 하나가 있었다. 누구지? 엄마에게 묻기 위해 손가락으로 그녀를 가리키는데 그녀도 똑같이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일순간 멍해져서 한참 그렇게 거울 속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눈물이 흘렀다.      


엄마는 간병인을 마중하고 돌아왔다. 나는 다시 몸을 눕히고 엄마를 바라보며 말했다.

“엄마, 나 미숫가루 먹고 싶어. 설탕 듬뿍 넣어서.”

엄마는 그때처럼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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