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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양이쌤 Feb 18. 2021

산책, 산 책

“책이 참 많으신데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작가나 책이 있다면요?”

*갑자기 떠오른 장면 하나를 이야기로 만든 초초초 짧은 소설입니다.

소설 공부한 적 없어서 마음대로 썼어요:)






6월의 공기가 차갑다. 현주는 오늘도 새벽에 잠을 깼다. 6인실 호스텔 생활도 벌써 두 달째지만 여전히 잠을 푹 이루기가 힘들다. 처음에는 남녀 공용 호스텔에 머물렀다. 조금이라도 싼 방에 묵고 싶었기 때문이다. 현주처럼 장기로 묵는 사람은 6인실에 오지 않았다. 보통 하루나 이틀을 머무는 게 다였다. 그런데도 참 기막히게 매일 같이 코고는 사람이 있었다. 심하게 코를 골아 이층 침대를 벌벌 떨리게 만들던 스페인 청년이 떠나고 좀 잘만할까 했는데, 얌전하게 생긴 삐쩍 골은 일본 남자는 삐익삐익하는 아주 이상한 코골이를 했다. 처음엔 조용하게 느껴졌는데 나중엔 그 소리가 고요한 밤 시계초침소리처럼 현주의 귀에 파고들었다.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그럭저럭 버텼지만 이과수 폭포에 다녀오던 버스에 폰을 두고 내린 이후 더는 견디기 힘들었다. 현주는 2주일 만에 여자 6인실로 자리를 옮겼다. 천둥처럼 코를 고는 사람들은 없었지만, 오래된 이층침대의 삐걱임은 현주를 결국 일찍 일어나게 만들었다. 현주야 장기투숙객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바삐 관광을 하고 떠나야 하는 사람들이니 새벽같이 일어나 짐을 싸댔다. 그들이 일어나는 시간이 현주가 잠 깨는 시간이 됐다.    

 

아침마다 오늘 어딜 가느냐, 너는 어디어디 가봤느냐, 언제 한국으로 돌아가느냐는 질문에 시달리기가 싫어 산책을 나갔다. 딱히 갈 데가 있는 건 아니라 늘 이곳저곳 걷다 저렴해 보이는 카페가 있으면 들어가 커피와 함께 간단한 아침식사를 한다. 맛있는 곳을 발견해도 두 번은 가지 않았다. 아무도 아는 척을 하지 않았으면 해서다.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이름처럼 맑은 공기의 도시는 아니다. 자동차 매연 때문에 코를 싸쥘 때도 많고 대형견들이 워낙 많이 돌아다녀 개똥도 많다. 그러나 여기저기 공원과 광장이 많아 산책하기에 꽤 좋다. 위험한 일만 아니라면 말이다. 날로 악화되는 경제 사정 때문에 치안이 불안해 카메라나 배낭을 도난당하는 일이 관광객들 사이엔 비일비재하다. 현주에게는 다행히 그런 일이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카메라를 매고 다니지도 않았고 가방을 들고 다니지도 않았다. 까만 비닐봉지 안에 지도와 물통 하나 넣고 돈은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누구도 그녀를 관광객으로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풍경에도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삶에도 관심이 없었다. 12년 간 일하면서 가장 큰 돈을 번 어느 날 현주는 그냥 이곳으로 오는 항공권을 결제했다. 한국의 반대편에 있는 나라라는 것도 매력적이었다. 현주는 되도록 가장 멀리 떠나고 싶었다.      


현주가 굳이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선택한 건 한 신문칼럼 때문이다. 인구 대비 서점의 수가 가장 많다는 책의 도시. 경제난에도 불구하고 책만은 사 본다는 시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엘 아테네오’. 대필작가지만 명색이 작가라는 직업으로 살아온 현주에게 아주 예전에 본 그 칼럼은 어떤 환상을 주었다. 산책하다 골목에 오래된 서점을 발견하면 그곳에서 한참 시간을 보냈다. 전혀 읽을 수 없는 책을 읽으며.     




25살 때 어느 지방시장의 자서전을 대필하며 시작된 이력은 끊어내려 해도 끈질기게 그녀를 따라다녔다. 그 책은 정치자금을 모으는 행사에 유용하게 쓰였고 시장은 재선에 성공했다. 정치자금을 모으는 새로운 비법으로 자서전 출판이 유행하게 되면서 일은 끊이지 않고 들어왔다. 현주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 물론 자서전 쓰기도 소설과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등단을 하고 자기 이야기로 먹고 살고 싶었다. 어디 산 속이라도 처박혀 소설을 쓰려면 돈이 필요했다. 딱 2년만 하려고 했던 일이 12년이 되기 직전 큰 건이 들어왔다. 한 재벌의 자서전 대필이었다.     


14살에 집을 나와 혈혈단신으로 밑바닥부터 시작해 재벌이 된 한 남자의 자서전이었다. 인터뷰를 위해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대문부터 집까지 한참을 걸어 들어가면서 그녀는 이미 위축되었다. 서재의 위용은 더 대단했다. 천장까지 트인 구조에 한쪽 벽을 제외하고 모든 벽면이 책장이었다. 빽빽한 책은 적어도 작은 도서관 수준이었다. 이 남자가 과연 이 책을 다 읽었을까? 그 질문이 입에서 맴돌았지만 끝내 하지 못했다. 그 남자는 책 말고도 할 말이 많았다.     


첫 인터뷰가 끝나고 편집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 남자가 현주를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고, 당장 계약을 하잔다며 부산스럽게 떠들어댔다. 반백의 남성에게 압도되어 제대로 질문조차 하지 못했던 그녀는 의아했지만 얼떨결에 다음 인터뷰 날짜를 약속하고 말았다. 다음 날 계약금으로 그녀의 상상보다 두 배나 많은 돈이 입금되었다.     


석 달 동안 일주일에 두 번 그의 서재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현주는 따로 질문을 준비하지 않았다. 그의 이야기를 충실히 듣고 기록하고, 이야기의 시간과 공간이 비는 지점만 질문을 해 그의 인생에 빈틈이 없도록 했다. 자신에 대한 환희가 가득 찬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 있을 때면 현주는 더더욱 움츠러들었다. 사실 듣고 싶지 않았다. 남자의 이야기는 딱 들어봐도 무식한 개발주의자의 허세 가득한 자화자찬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철학도 느껴지지 않았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해왔던 그의 이야기에 지쳐갈 때쯤이면 자연스레 그의 뒤 책장으로 눈이 갔다. 현주가 읽은 책이 대부분이었다. 저 책들을 읽었다면 저런 가치관을 가질 수 없을 텐데 하는 마음이 가득했지만 입 밖에 꺼낼 수는 없었다. 저 책을 읽지 않은 그는 저 책을 읽은 현주에게 많은 돈을 주고 있으니까.     


인터뷰가 끝나고 그가 식사를 제안했다. 함께 밥을 먹으며 그는 현주에게 말했다. 오랫동안 대필 작가를 구해왔는데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오는 놈들마다 작가나부랭이랍시고 어찌나 아는 체를 하던지 꼴사나워 쫓아내버렸다고 했다. 가치관이니 철학이니 하면서 돈도 안 되는 질문이나 해대는 통에 내 할 말을 까먹어버린 게 한두 번이 아니라며 그 새끼들은 들을 자세가 안 돼 있으니 그 모양 그 꼴로 사는 거라 말했다. 출판사에서 여자를 추천하길래 사내놈들 거친 인생을 여자가 어찌 아냐고 딱 잘라 안 된다 했는데 하도 추천해서 현주를 만나봤다는 거다. 그런데 현주만이 이 질문을 하지 않더란다.     

“책이 참 많으신데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작가나 책이 있다면요?”     


생각대로 그 남자는 그 책을 한 권도 아니 한 장도 읽지 않았다. 그 책은 초등학교도 졸업을 못한 그의 콤플렉스를 덮기 위함이었다. 들키고 싶지 않은 치부를 들먹이는 작가들을 내쫓은 그는 자신의 권위를 침범하지 않는 현주를 받아들였다.     


사실 현주는 앞의 그 작가들과 똑같이 그를 혐오하고 있었다. 속으로 수천 번 같은 질문을 했다. 저 책 중 읽은 책이 몇 권인지, 도대체 글이란 건 읽고 사는지, 신문은 보는지. 단지 소리를 내지 않았을 뿐 속으로는 온갖 멸시를 보냈다.     


현주는 그의 말에 웃으며 대답했다.

“책이 뭐 중요한가요. 살아온 인생이 어느 작가의 책보다 큰 배움이 되는 걸요.”

그 남자는 흡족하게 웃고는 보너스라며 두툼한 봉투를 테이블 위에 던졌다.     


책이 출판되기 전에 그녀는 황급히 서울을 떠났다. 여행을 갈 때는 늘 책을 챙기는 게 우선이었지만 이번 여행은 달랐다. 활자로 찍혀있는 건 비행기 티켓을 제외하곤 아무 것도 읽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일요일이라 산 텔모에 가려 한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온 후 매주 이곳을 산책한다. 수많은 관광객들 사이를 이리저리 걷다 거리의 악사들 노래를 한참 듣고, 탱고 공연도 구경한다. 그리고 오래된 책을 파는 노점을 보면 다가가 “올라”하고 인사한 다음 찬찬히 한 권 한 권 책을 펴 본다. 꼭 한두 권은 산다. 여전히 스페인어를 한자도 읽지 못한다는 게 그녀를 편안하게 만든다. 스페인어에 익숙해지는 그날 그녀는 또 다른 곳을 향해 배낭을 쌀 것이다. 그 배낭에는 여전히 책이 한 권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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