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양이쌤 Feb 06. 2021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모두가 봤지만, 아무도 모르는

*갑자기 떠오른 장면 하나를 이야기로 만든 초초초 짧은 소설입니다.

소설 공부한 적 없어서 마음대로 썼어요:)





찰나가 느리게 흘렀다. 그 남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천천히 화분을 밀었고, 화분은 둥둥둥 떠내려 와 그녀의 머리에 내려앉았다. 그녀는 나를 보고 한참 무슨 영화 얘기를 하는 중이었는데,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눈이 천천히 감겼고, 파편이 낙엽처럼 흩날렸다. 내 눈은 여전히 그 남자를 향해 있었는데 그 남자는 잠시 나를 응시하더니 창문 안으로 스윽 안으로 사라졌다.     


사람들이 웅성웅성 몰려들었다. 누군가는 어디로 급히 전화를 하는 듯했다. 나는 가만히 서서 쓰러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까지 재잘거리던 빨간 입술처럼 그녀의 얼굴도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저 여자 죽은 거야?

-이봐요. 당신 괜찮아요? 이 사람도 충격이 심한 것 같은데.... 정신 차려요!     

 

*

                                     

-난 봤어요. 어떤 남자가 4층 창에서 화분을 밀었어요. 내가 분명히 봤어요.

이 말을 수십 번 했다. 경찰에게도, 119 대원에게도,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가족들에게도.

-이봐요. 4층은 비어있는 건물이에요. 밖에서 잠겨있었고, 안에 누가 들어간 흔적도 없다고요. 

-제가 보고 있었다니까요. 중년 남자였어요. 낚시 모자 같은 걸 쓰고 있었고.... 나랑 눈이 마주쳤어요. 몽타주를 그릴 수 있을 거 같아요.

-아, 이 사람 참 말이 안 통하네. 젊은 사람이 왜 이래요. 거긴 누가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니까요. 주변 CCTV도 다 봤어요. 들어간 사람이 없다는 거 확인 다 했다니까.

-그럼 내가 본 사람은 뭐죠? 내가 귀신이라도 봤다는 건가요?

-당신이 너무 충격을 받아서 헛 걸 볼 수도 있는 거 아니요? 좀 진정하고 일단 집에 가 있어요.

-내 여자 친구가 지금 혼수상태에 있고, 난 범인을 봤는데 집에 가 있으라니요! 몽타주라도 그려봐야 되는 거 아닙니까?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많았으니 목격자가 있을 수도 있잖아요!

-아, 참.... 거.... 야! 박형사! 이 분 좀 집으로 모셔다 드려.


*     


그녀의 이야기가 인터넷 이곳저곳을 떠돌고 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떨어진 화분에 맞아 혼수상태”

 “벼락 맞을 확률보다 길 가다 화분에 맞아 죽을 확률이 낮다는 연구 결과”

 “이 주의 진단-조심성 없는 보행자들의 행태”

 “해피트리(화분에 심어져 있던 식물)가 언해피트리가 된 사연”

 “보행자 사망 시 보험금 책정도 문제”


기사 제목도 웃기지만, 그 아래 댓글들이 더 흥미롭다.

-얼마나 지은 죄가 많으면 길가다 화분에 맞아 죽냐ㅋㅋ 전생에 이완용 각 ㅋㅋㅋ

-그러게 밖에 왜 싸돌아 다녀. 집에 있었으면 안 죽었을 텐데

-여자들이 하여튼 문제야. 옆에 있던 남자 얼마나 놀랬겠어. 지 여친 머리 터진 거 다 봤을 텐데 웩

-건물 안에 아무도 없었다는데.... 귀신 아냐 무섭다 후덜덜

-불쌍하긴 뭐가 불쌍해. 나라 지키다 돌아가신 분도 얼마나 많은데!

-보험금 받으려고 꾸민 짓 아닌가 확인해봐야 됨. 남친 이름으로 사망보험 들었다면 제2의 낙지 사건임!   

  

*     


가족과 친구들은 나를 위로하려 했다. 내가 필요한 건 위로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난 단지 알고 싶다고 말했다. 그 남자는 누군지, 왜 우리가 지나갈 때를 기다려 화분을 떨어뜨린 건지,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내 눈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던 이유는 뭔지, 분명히 있었던 그 사람을 경찰은 왜 없었다고 말하는지, 난 그걸 알고 싶은 거라고. 그걸 그녀에게 말해주어야겠다고.     

그러나 사람들은 자동응답기처럼 같은 말만 반복한다.

-이제 뭘 어쩌겠어. 그만 잊어.

-재수 없었다고 생각해. 바람이 그때 심하게 분 걸 누굴 탓하겠니.

-걔도 네가 다 잊고 새 삶을 살길 바랄 거야. 

-그만해! 이젠 지겹다. 언제까지 화분 얘기만 할 거야! 


불과 3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모두 잊으라는 말만 했다. 내 기억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그 남자와 그 순간을 어떻게 강제로 지우라고 하는지 알 수 없다. 난 알고 싶고 알아야만 한다. 그녀도 그걸 듣기 위해 아직 마지막 숨을 붙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 3일이 가고, 담당 형사에게 전화가 왔다. 경찰서로 나오라고 했다. 가보니 노인 한 분이 앉아계셨다.

-이 분이 건물줍니다. 인사 나누세요.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그 건물 주인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하다는 말씀이시죠?

-이 영감님이 비어있는 4층에서 화분을 키우신 분입니다.

-그래서요?

-아 그러니까, 그 화분이 이 영감님 화분이라고요.

-그런데요? 이 분은 제가 목격했던 그분이 아닙니다.

-내 말은.... 아.... 참.... 이 사람이 참. 이 영감님이 화분을 밀었다는 말이 아니고, 그 화분 주인이라는 거요. 화분을 거기다 두신 분이니까 책임이 있지요. 물건을 위험하게 놔뒀잖아요. 떨어질지도 모르는데.


노인은 두 손을 잡았다 놓았다가, 한숨을 연신 쉬었다가 입이 마른지 입술을 혀로 닦아댔다. 

-이 분이 거기 화분을 두신 건 저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누군가 그 화분을 밑으로 떨어뜨린 게 문제지요. 이 분 건물이니 이 분 가족이나 지인 중 범인이 있을 수도 있겠네요. 조사해보면....

-됐고요. 재판 가면 이 분에게 벌금이 매겨질 거요. 그거보단 합의하는 게 그쪽한테도 좋을 거 같아 부른 거예요.

-합의는 무슨 합의예요! 화분에 무슨 지문 같은 것도 없었나요? 흔적이라도 있으면 범인 잡을 생각을 해야 할 거 아닙니까!

-화분이야 그날 바로 치웠지. 지문은 무슨 지문이요!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가장 중요한 증거. 범행도구인 화분을 그들은 범행 당일 없애버린 것이다. 우물쭈물 침만 삼키고 있는 노인을 뒤로하고 경찰서를 나왔다.     


그녀에게 간다. 그녀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까? 그날 그 시간 그 건물 밑을 걸어갔던 네가 잘못한 거라고? 네가 꼭 그 영화를 봐야겠다고만 하지 않았어도 그 길을 걸어갈 필요 없지 않았냐고? 그 사람은 너를 노린 게 아니니까 그 사람을 탓할 수는 없다고? 어차피 일어난 일이니까 모두 잊고 넌 그냥 죽으면 된다고? 많은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지만 입 밖에 낼 수 있는 말은 한마디도 없다.     


드르륵

병실 문을 열었다. 그 남자가 그녀 앞에 서 있다. 그 남자가 서서히 손을 뻗어 그녀의 호흡기를 떼어 내고 있다. 

삐-

천천히 죽음의 신호음이 울리고 그 남자는 나를 조용히 응시하며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낮게 속삭인다.

-쉿!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그저 그런 일일 뿐이야.

이전 05화 내게 주어진 사명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