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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양이쌤 Apr 01. 2021

모래

누군가를 사랑하려면

*갑자기 떠오른 장면 하나를 이야기로 만든 초초초 짧은 소설입니다.

소설 공부한 적 없어서 마음대로 썼어요:)





정은은 산책을 하다 만난 조그만 선물가게에서 또 모래시계를 샀다. 손가락만한 앙증맞은 사이즈의 모래시계인데 모래 색이 다양했다. 노랑과 파랑, 민트 세 가지를 골랐다. 셋을 함께 두면 어울릴만한 색은 아니지만, 하나하나가 마음에 들어 어쩔 수 없었다. 집에 돌아와 포장을 풀고 선반에 모래시계를 올리며 세어 보니 크기와 색, 모양이 다른 모래시계가 서른 개를 넘어간다. 여행을 가거나 오늘처럼 예쁜 소품을 파는 가게를 만나면 하나씩 사 모으던 것부터 정은의 취향을 아는 이들이 준 선물까지 합하니 다섯 칸짜리 작은 수납장 하나를 꽉 채운다. 정은은 모래시계를 돌릴 때마다 이건 시간을 되돌리는 작은 타임머신이야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모래시계를 돌려봐도 미래로 더 미래로 향할 뿐이다.      


사실 정은이 좋아하는 것은 모래시계가 아니라 모래다. 모래를 곁에 두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 모래시계를 사는 것이었다. 움켜쥔 다음 서서히 주먹을 펴면 사라락 바람에 날려 떨어지는 그 모양과 느낌을 사랑했다. 그 순간을 박제해둔 게 모래시계라고 정은은 생각했다.      


수많은 모래시계 중 가장 애착을 가지고 있는 건 4년 전 인도를 여행하던 중 바라나시 기념품 가게에서 산 모래시계다. 정은이 산 건 아니었고, 함께 여행했던 준호가 사서 선물한 것이다. 시체를 태우고, 소를 씻기고, 목욕을 하고, 그 물로 차를 끓여 마시는 바라나시의 강은 그야말로 진창이다. 바라나시에 도착하자마자 손가락 하나도 닿기 싫은 그 물에 준호는 몸을 담갔다. 그들처럼 영혼을 씻어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미련을 씻어내려 했는지도. 석양이 지는 강에 몸을 반쯤 담근 준호는 꽤 아름다웠다.      


몸을 담근 날부터 정은은 준호와 한방을 쓰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런 정은을 보며 준호는 정은이 모래 같은 여자라고 말했다. 꽉 쥐었다 싶으면 스르륵 빠져나가는 그런 모래 같은 여자라고 농담처럼 말했다. 정은은 씁쓸하게 따라 웃었다.      


정은과 준호는 7년을 넘게 만나왔다. 준호는 떠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그럴만한 능력도 되는 사람이었다. 정은은 준호가 떠날 때마다 다른 사람을 만났고, 준호가 돌아오면 그 남자와 함께 준호도 만났다. 준호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난 외로운 건 못 참는 사람이야. 그게 싫으면 그만 만나. 하고 야멸차게 말했다. 그럼 준호는 또 싱긋이 웃으며 정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곤 했다. 그 남자와는 그만 만나는 게 어떠냐는 말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준호는 머물 자신이 없었고, 정은은 혼자될 자신이 없었다. 준호는 여행을 다녀올 때마다 기념품을 사왔는데, 어느 순간부터 모래시계만 사오기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할 때쯤, 공부를 하러 미국으로 가겠다던 준호는 정은에게 인도 여행을 제안했다. 델리에 도착해 타지마할을 보고 카주라호를 거치는 동안 정은은 지쳐갔다. 첫 해외여행인데다 평균 40도가 넘어서는 인도 날씨, 입에 맞지 않는 음식, 호기심 많은 사람들에 지쳐갈 때마다 준호는 정은을 위로하고 보듬고 웃음을 찾아주었다. 정은은 점점 더 준호에게 기대고 집착하게 되었고 그런 자신이 미워졌다. 누구에게도 기대며 살고 싶지 않았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에게 부담이 되는 건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혼자될 자신도 없었지만, 준호에게 혼자 설 수 없는 사람처럼 보이는 건 더더욱 싫었다.     


여행이 중반에 들어설 무렵 둘은 자이살메르로 향했다. 사막의 도시 자이살메르. 정은이 사랑하는 모래가 가득한 도시. 둘은 낙타를 타고 사막을 일주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사막의 밤은 황홀했다. 마치 화성에 누워 우주를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둘은 차가운 모래 위에 누워 말없이 하늘만 바라보았다. 손을 뻗으면 별을 만질 수 있을 것 같고, 눈을 깜빡이는 사이 별이 떨어져 내릴 것 같았다. 정은은 두 손으로 모래를 쥐었다 폈다 하며 여행의 고단함을 녹여 내리고 있었다.      

“정은아, 우리 여행 끝나고 같이 미국으로 가지 않을래?”

“....”

“여행하는 한 달 동안 쭉 같이 있었잖아. 같이 눈 뜨고 같이 밥 먹고 같이 자고. 우리 이제 함께 있자.”

“내가 미국에 어떻게 가. 영어도 못하는데. 너 공부할 때 난 뭐하란 거야? 나도 내 인생이 있어.”

계속되는 준호의 설득에도 정은은 더욱 완강하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모르겠어. 넌 계속 내 곁을 떠날 거 같아. 그럼 난 남겨질 테고. 니가 억지로 내 곁에 남아있다는 생각이 들면 난 비참해질 거야.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고 빚을 지고 사는 건 딱 질색이야.”

“이번엔 확신을 줬다고 생각했는데 넌 또 내 손을 빠져나가는 구나.”


준호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정은은 언제나 그랬다. 누구보다 외로워하면서 사랑 받는 것을 힘겨워 했다. 준호에겐 확신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정은을 떠날 이유에 대한 확신.     


사막을 벗어나 마지막 여행지 바라나시로 가는 동안 둘은 별 말이 없었다. 바라나시에서는 방을 따로 썼고, 다른 일행들과 어울렸다. 단체로 들른 기념품 가게에서 준호는 이별 선물이라며 이 모래시계를 사주었다. 바라나시 강가의 은빛 모래가 담긴 모래시계.      


다른 모래시계는 자주 만지고 닦아주었지만 은빛 모래시계는 수납장 맨 위 구석에 놔두고 건드리지 않았다. 몇 년 만에 시계를 돌려보았는데 모래가 굳었는지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그날 사막의 밤이 정은의 가슴에 굳어 있는 것처럼. 정은은 모래시계를 들고 바닥에 내리쳤다. 윤기를 잃은 모래가 파스스 흩어진다.


모래와 유리가 섞여 그날처럼 생생하게 은빛을 낸다. 정은은 바닥에 흩어진 모래를 손바닥으로 끌어 모았다. 유리 조각 때문인지 손바닥이 따끔거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지금껏 스스로에게 준 상처에 비하면 이쯤은 아픔도 아니다. 자신을 미워해서 단단한 관계를 두려워했고 외로움은 유리가 되어 나와 주변 사람들을베었다. 알알이 피가 맺히는 손바닥을 보며 정은은 생각했다. 이제는 차갑고 흩날리는 모래가 아닌 따뜻하고 밀도 높은 흙이 되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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