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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양이쌤 Apr 07. 2021

단어

*갑자기 떠오른 장면 하나를 이야기로 만든 초초초 짧은 소설입니다.

소설 공부한 적 없어서 마음대로 썼어요:)




엄마는 말이 없었다. 열두 살 무렵까지 함께 살았는데 아무리 떠올려 봐도 몇 마디 정도다. 

밥 먹어. 이제 자라. 

대화랄 것도 없는 일방적 명령에 가까운. 사실은 독백에 더 가까웠다. 그 몇 마디 단어조차 내 얼굴을 보고, 눈을 마주치고 했던 기억은 없다. 


엄마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유치원에서 배운 노래를 가르쳐주겠다고 엄마 앞에 서서 열심히 율동까지 하며 불렀던 적이 있다. 엄마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고 생각한 순간이 있었고, 그때 나는 조용히 춤과 노래를 멈추고 엄마 옆에 나란히 앉았다. 그렇게 어린 나이였지만 엄마의 시선이 내가 아니라 내 뒤 텔레비전에 가 있단 게 느껴졌다. 


나는 엄마의 시선을 따라 함께 텔레비전을 한참 동안 봤다. 코미디 프로도 드라마도 아니었다. 동물의 왕국이었다. 어미 사자는 새끼 중 가장 약하게 태어난 무녀리를 돌보지 않았다. 튼튼한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다가도 무녀리가 겨우 젖을 찾아 물면 벌떡 일어나 딴 데로 가버렸다. 그러다 힘이 빠진 새끼는 무리를 따라 이동하지 못하고 초원 한 가운데 쓰러지고 만다. 밤이 되자 주변에는 그런 무녀리쯤은 한 입에 찢어발길 수 있는 포식자들이 하나둘 사냥을 나서는데…….


거기서 내레이션이 끝나고 다음 이 시간에. 라는 문구가 뜬다. 그날 밤 나는 엄마를 찾으며 초원을 해매는 무녀리가 된 꿈을 꾼다. 기억이 이리 생생한 까닭은 그 프로그램이 수없이 재방송 됐기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나는 늘 봤던 장면만 보게 된다. 그 무녀리가 하이에나의 장난감이 되었는지 표범의 간식이 되었는지 갈증과 배고픔에 서서히 죽어갔는지 아니면, 어쩌면, 어미 사자에게 죽임을 당했는지.


다음 이 시간에. 라는 화면을 보면서 어쩌면 무녀리가 늑대 무리에 들어가 늑대 젖을 먹고 초원의 왕이 되었을지도 몰라. 하는 상상을 하기도 했지만 좀 더 크고 나선 아프리카 초원엔 늑대가 살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선 공부를 잘하면 엄마가 말을 걸어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백점짜리 시험지가 가게 오픈 전단지처럼 쌓여가도, 내가 직접 내방에 붙인 상장이 벽 한 면을 다 뒤덮어도 엄마는 흔한 칭찬 한마디 하지 않았다. 


혹시 우리에게 아빠가 없어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어렸을 땐 자주 물었다. 아빠 어디 갔어? 그때마다 엄마는 그냥 없어. 라고 했다. 죽었어. 라는 딱 떨어지는 답은 아니라도. 어디 멀리 갔어. 몇 밤 자면 올 거야. 같은 모호한 답은 아니라도. ‘그냥’과 ‘없어’는 참 조합하기가 어려운 말이었다. 특히 아빠의 부재를 설명하기에는 아주 부적합한 말이 아닐까. 그때부턴 엄마의 언어능력에 문제가 있다고 여겼다. 말을 하고 싶어도 엄마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단어들이 서로 입 밖으로 나가겠다고 싸우다 그중 승리한 단어 딱 하나가 튀어나온 것뿐이라고. 나온 녀석 하나가 모자라고 기분 나쁜 거라 그렇지. 마치 아빠의 수많은 정자 중 하나가 엄마의 난자와 만난 것처럼. 그래서 내가 튀어나온 것처럼.


엄마와 대화하는 것이 익숙해지고 두 개의 단어에서 문단까지 추론하는 능력이 커질 때쯤 한 남자가 찾아왔다. 나의 할아버지. 아빠도 못 봤는데 아빠의 아빠가 나타나다니. 놀랍다기보다는 저 남자가 ‘그냥’과 ‘없어’의 조합을 설명해줄지 모른다는 호기심이 더 컸던 것 같다. 


그날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또렷하고 날카로운, 추론을 하지 않아도 되는, 완벽히 문장으로 이루어진 엄마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네, 알겠어요. 저도 그냥 없는 일이 되면 좋겠어요."     


나는 아빠처럼 엄마에게 그냥 없는 사람이 되어 아빠의 아빠와 함께 서울에서 살게 되었다. 그곳엔 아빠의 엄마도 있었는데 한시도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여자였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끝이 나지 않는 문장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들 사이에서 엄마의 두 단어 말하기는 내 생존법이 되었다. 

학교 다녀올게요. 밥 먹었어요. 숙제 했어요. 이만 잘게요.


*     


두 단어와 네버엔딩 문장 사이에서 6년이 흘렀다. 수능이 끝나고 한가한 시간이 계속되었다. 나는 주로 두 단어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책을 읽었다.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기 위한 내 나름의 준비였다. 점심인지 저녁인지 애매한 시간에 혼자 밥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던 어느 날. 무녀리의 다음 이 시간이 방영되고 있었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무녀리가 야생의 밤을 무사히 살아내고 무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어미도 형제도 무녀리를 유령 취급했다. 탈수와 배고픔으로 휘청대는 무녀리를 아랑곳하지 않고 이동을 시작했다. 악어가 득실대는 강가에 이르자 어미는 영민하게 새끼들을 안전한 지름길로 이끌었다. 뒤늦게 도착한 무녀리는 그 길을 알지 못했고 그만 미끄러져 악어가 노려보고 있는 강물에 빠지려고 했다. 안간힘을 쓰며 낑낑거리는 무녀리. 내 모든 예상과 달리 결국 악어에게 잡혀 먹히는 구나. 결국 죽는구나. 저 어미에겐 무녀리가 그냥 없는 새끼였겠지. 씁쓸한 마음으로 총각무를 베어 물던 순간. 어미가 달려왔다. 갑자기 나는 엄마가 보고 싶었다. 엄마는 내게 그냥 없는 사람이 될 수 없었다.     


*     


봄이 돼서야 엄마 집을 찾아 갔다. 엄마는 또 특유의 욕망이 제거된 눈으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예전보다 짧게 한 단어만 구사했다. 

왔어. 앉아. 


TV에선 한 젊은 엄마가 세 아이를 죽였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엄마가 아이를 죽였다는 것보다 내 또래가 세 아이를 낳았다는 게 놀라웠다. 그와 함께 막상 내가 엄마 나이도 잘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엄마. 나 알겠어? 나 혜정이야.

엄마. 나 스무 살이야. 엄만 몇 살이야?

엄마. 나 이번에 대학 가. oo 여자 대학교 자랑스럽지?

엄마. 나 하나도 안 보고 싶었어? 난 아주 가끔 엄마 생각했어.

엄마. 나한테 예전에 도대체 왜 그런 거야? 내가 태어난 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

한번 터진 질문은 커지고 커져 세 단어, 네 단어가 넘어 여섯 단어가 되었다.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없던 엄마가 나를 또렷이 바라보며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열일곱. 

널 낳았어. 

지하철 화장실에서 혼자. 

아이를 죽인 엄마 난 이해해. 

그래도 난 널 죽이지는 않았잖아.     


섬뜩한 말이지만 왠지 따뜻하게 들렸다. 나는 엄마를 꼭 안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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