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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양이쌤 Apr 08. 2021

내게 주어진 사명은

사이코패스의 탄생

*갑자기 떠오른 장면 하나를 이야기로 만든 초초초 짧은 소설입니다.

소설 공부한 적 없어서 마음대로 썼어요:)





주어진, 주사명.     


우리는 쌍둥이로 태어났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부모님은 우리의 이름 또한 그들의 신념이 드러나도록 지었다. 주께서 주신 사명대로,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아내길 바라며 지은 이름이라 한다. 부모님의 바람과는 다르게 우리는 경건히 크지 못했다. 교회 기도 시간이면 우린 "둘 중 하나라도 주예수가 아닌 게 어디냐"며 키득대곤 했다.      


나는 몇 분 더 빨리 태어난 덕분에 어진이란 이름을 갖게 된 것이 늘 다행이라 생각했다. 성만 떼어내면 그리 부담스런 이름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명이는 학년이 바뀌어도 언제나 친구들의 놀림감이 됐다. 사명이가 무슨 말만 하면 "사명을 받들겠나이다!"하며 놀려댔다. ‘주사기’란 별명은 기본이었다. 그리 기분 나쁜 말도 아닌 것 같은데 사명이는 끝내는 화를 내고 마는 것이다. 나는 그런 사명이가 멍청해보였다. 별 반응이 없으면 재미없어 그만둘 텐데 길길이 날뛰니 더 자극하고 싶은 게 아닌가. 사명이에게 그러지 말라고 말할까 했지만, 나도 사실 좀 재미있는 구석이 있었다. 사명이가 특히 화가 난 날은 집에 와서 자길 놀린 애를 어떻게 죽여버릴까 궁리하는 얘길 듣는 게 재미있었다. 스케치북에다 죽일 아이를 그려놓고 "사지를 토막낼까? 아냐, 불에 타 죽는 게 제일 괴롭대"하며 입으로 수십 번 그 아이를 죽였다 살렸다 하는 꼴이 우스웠다.      


그 스케치북을 엄마에게 들킨 건 현지란 계집애 때문인데 그 애가 사명이의 스케치북을 봐버리곤 그걸 곧장 담임에게 갖다바쳤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 내가 그 스케치북을 학교에 가져갔기 때문이다. 실수로 스케치북을 바꿔 들고오긴 했으나, 학교에 오자마자 실수를 알게 됐다. 나는 모른척 스케치북을 꺼내 펼쳤다. 현지는 내 짝이었다. 반장으로서 사명감이 투철한 그 아이가 이 그림들을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살짝 궁금하기도 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반응이 나와 싱거웠지만 말이다.     


담임은 당장 엄마를 학교로 불렀다. 학교 상담 전담 선생님과 담임, 엄마는 한참을 대화를 나눴고, 엄마는 얼굴이 벌개져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엄마는 사명이를 두들겨 패고, 스케치북을 좍좍 찢어 버렸다. 다시 또 이런 걸 그리면 둘이 같이 죽는 거라나 뭐라나. 나에겐 아빠한텐 절대 말하지 말라고 당부를 했다. 아빠가 알면 보나마다 엄마를 가만 놔두지 않을 거라며. 나도 아빠와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집이 시끄러워지는 건 딱 질색이니까. 나중에 엄마가 이모랑 통화하는 걸 엿들으니, 담임이 사명이에게 정신과 상담을 받으라고 했나 보다. 엄마는 애가 장난이 좀 심하고 창의력이 뛰어나서 그런 걸 갖고 학교에서 유난을 떤다며, 우리 애를 사이코패스 취급하는데 자존심이 상해서 전학이라도 가야하나 싶다며 두 시간이 넘게 이모와 수다를 떨었다. 그날 이후 엄마는 사명이를 정신과에 데려가지 않았다. 대신 매일 새벽 기도에 데려갔다. 목사님과 함께 기도를 하는데 사명이는 그 시간을 끔찍해했다. 두 사람의 열렬한 기도에도 사명이는 변한 게 없었다. 단지 변한 거라면 그림을 그리고 바로 버린다는 것. 그리고 그림의 주인공이 엄마와 담임으로 바뀌었다는 것. 사명이는 학교에서 사이코패스라 불리기 시작했는데, 그 별명을 주사기나 사명감, 사명을 받들다 보다는 훨씬 마음에 들어 했다.     


한날은 인터넷에서 봤다며 '사이코패스 테스트'라는 걸 들고 왔다. 말도 안 되는 테스트였지만 몇 가지 서늘한 것도 있었다. 특히 자매에 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두 자매가 있었습니다. 친척의 장례식장을 갔다가 정말 잘생긴 한 남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두 자매는 정말 그 남자가 잘 생겼다며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알고 보니 그 남자는 정말 먼 친척이었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 언니는 동생을 죽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명이는 자기가 말한 답이 사이코패스에 해당됐다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답이 뭐냐고 물으니 “동생을 죽이면 장례식이 또 열리고, 그럼 그 남자를 다시 볼 수 있으니까.”

나는 사명이가 한심했다. 사이코패스라면 애초에 그 남자에게 호감을 가질리도 없고, 충동적으로 살인을 저지를리도 없다고 생각했다. 사이코패스는 보통 지능이 굉장히 높다고 하지 않는가. 그 테스트는 열 가지 정도 됐는데, 사명이는 자기 점수가 꽤 높다며 우쭐댔다.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발견하기도 한 것처럼.     

새벽기도는 석 달째 이어졌다. 일요일 새벽 기도를 다녀온 사명이가 나를 깨웠다. 

“언니, 언니 좀 일어나 봐! 나 할 말 있어.”

주말은 늘 늦잠을 자는데 깨워대는 게 짜증이 나 모른 척 하려다 사명이가 나를 언니라고 부른 적이 거의 없다는 생각에 이상한 느낌이 들어 일어났다.

“왜 깨워. 나 더 잘 건데.” 

“내 얘기 좀 들어 봐. 엄마가 좀 이상해.”

“엄만 원래 이상해.”

“그게 아니야. 사실…….”


사명이 말은 엄마와 목사님이 좀 이상하다는 거다. 얼마 전부터 자기 혼자만 기도를 시키고는 엄마와 목사님은 더 특별한 기도를 해야 한다며 목사님 방으로 간단다. 오늘은 어떤 기도길래 나만 놔두고 가나 싶어 두 사람을 따라갔는데, 방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더란다. 아무렇지 않게 돌아와 기도를 하고 있긴 했는데 엄마와 목사가 이상한 짓을 하는 게 분명하다며 철철 눈물을 흘렸다. 어떻게 우리 가족을 배신할 수 있냐며. 아빠가 아무리 쓰레기라도 엄마까지 이러면 우리는 어디로 가냐고. 


엄마를 수십 번도 더 죽였다 살리던 사명이가 눈물을 쏟는 걸 보니 웃음이 나왔다. 제가 사이코패스 기질이 있다며 동네 길고양이나 괴롭히고 다니는 주제에. 나는 이 기회에 사명이가 제대로 된 사이코패스로 거듭나게끔 도와주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렇게 무서우면 엄마랑 목사님을 죽여 버려. 사고처럼 새벽 기도할 때 불을 질러버리는 건 어때? 여기 저기 촛불이니까 딱 불나기 좋은 곳이잖아. 교회 조립 건물이라 엄청 잘 탈 걸. 엄마 죽으면 보험금도 나오고, 아빠는 지금 바람피우는 여자랑 결혼도 할 수 있을 거고. 그럼 우린 새 엄마 생기니까. 아빠가 우리한테는 잘하잖아. 잘 들어봐. 내일 새벽 기도 가서 말이야…….”


내 입에서 나간 불길이 사명이의 눈으로 빨려 들어갔다. 사명이의 눈 속에 벌써 뜨거운 불길이 너울너울 춤추고 있었다.      


다음 날 새벽 사명이는 엄마를 따라 나가며 나를 한 번 돌아보고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손을 흔들어주었다. 평소에는 슬리퍼를 질질 끌고 나가더니, 오늘은 운동화를 단단히 동여매고 나가는 사명이를 보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나한테 주어진 사명이 바로 이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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