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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스 Jan 18. 2020

아이 없는 삶 특권일까 박탈일까

아이 없는 삶 특권일까 

“아이가 없어서 참 좋겠어요.” 이런 말을 들을 때 참 난감하다. 이전에 살던 빌라에 유독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 많았다. 오가다 마주치며 아이와 계단 한 층을 올라가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게 되었다. 아이들은 안아 달라 업어 달라 보채기도 하고, 쉽게 움직여 주질 않았다. 세 명의 아이를 데리고 외출하는 엄마는 정말 대단해 보였다. 계란 한 판 들기도 벅찬 내게 이들은 참 대단해 보였다. 그런 엄마들은 혼자서 다니는 나를 부러워하는 듯했다. 그런데 그런 눈길을 주는 것과 그런 감정을 직접 말해주는 것은 듣는 내 입장에서는 많이 다르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물론 둘 이상의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었다.


 스스로 만족할 수 없는 삶 그래서 고통이 된 삶에 당신 참 좋겠다는 ‘부러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가진 자가 갖지 못한 자를 부러워하다니 이런 아이러니가 있을까. 남의 상처를 그런 식으로 건드리느냐고 항의할 수도 없다. 아마 말한 이들은 진심이었을 테니까. 아이 없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이런 삶이 익숙해지고 편안하게 느껴진 것도 사실이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보통 그런 말을 들은 날은 늦게까지 잠들지 못한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심함에 분노가 일기도 했다가, 나의 고통이 누군가에게는 부러움이 될 수 있다는  슬픔에 빠지기도 한다. 사람은 늘 다른 이들이 가진 것을 바라보고 사는 존재인가 보다. 나는 그들이 부럽고, 그들은 나를 부러워한다. 육아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저런 말을 할까 그렇게 그런 말들을 넘긴다. 


명절에 친정에 내려가면 다섯 명의 조카들이 있다. 조카들이 어렸을 땐 친정이 마치 어린이집 같았다. 아이들은 쉬지 않고 놀아 달라고,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 달라고, 주목해달라고 달려온다. 나는 오랜만에 만난 조카들이 반가워 처음에는 놀아준다. 그러다가 얼마 못가 나가떨어지기 일쑤였다. 아이들을 귀여워하는 내게 아이 엄마들은 말한다. 

“하루만 애들하고 있어 봐 그래도 귀여운가.” 

육아가 얼마나 힘든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워킹맘들은 또 얼마나 힘들까. 나의 친언니는 아이 셋을 키우는 워킹맘이다.  언니는 아이들 키우는 일에 늘 허덕이다 보니 자기 삶이 없어 많이 힘들다고 했다. 아이들 생각에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는데 많이 지치는 모양이었다. 그래, 누군가에게는 분명 아이 없는 내 삶이 특권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을 마음 깊이 저장한다.


아이 없는 삶 박탈일까

아이를 다 키워 놓으신 50대 이상의 인생 선배님들에게 아이 없는 나는 참 불쌍하고 가여운 존재인 듯하다. 그 나이 때 분들은 일관되게 나를 보면 안쓰럽다는 듯한 눈길을 보내셨다. 한 번은 출산 후 조리를 마치고 집에 온 지인을 방문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한 모임에서 알고 지내는 분의 출산이었다. 불가피하게 만나야 하는 그런 관계였다. 모임에 속한 사람들이 출산을 축하하러 가기로 약속을 잡았다. 나는 별로 가고 싶지 않았다. 진심 어린 축하를 건넬 자신이 없었다. 불참하자니, 마땅한 이유도 없어 결국 참석했다. 태어난 지 30일 정도 된 아기는 매우 작았다. ‘아기가 잘 생겼다. 엄마를 닮았다.’ 하는 덕담이 오갔다. 


출산을 경험해 본 적 없는 사람은 내가 유일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출산 경험을 이야기하며 이런저런 대화를 이어 나갔다. 내가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자리를 지키는 것뿐이었다. 아이를 키워본 젊은 엄마들은 아기를 안아 보고 좋아했다. 아기는 정말 작았다. 저렇게 작은 아기가 자라 어른이 된다니 생명은 참으로 신비한 것이구나 그런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모임의 가장 연장자께서 나를 부르셨다.

 “와서 아이 좀 안아봐요”

 내게 아이를 안아보는 기회를 주시려고 했다. 나를 부르는 그분의 얼굴에는 연민이 깃들어 있었다. 목을 가누지 못하는 아기를 안는 것은 내게 너무나 두려운 일이다. 그 작은 생명이 행여나 불편해하지는 않을까 겁이 났다. 나는 간곡한 말로 거절하고는 결국 도망치듯 일어나 집으로 왔다. 문을 닫고 돌아서는데,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기를 보니 또 낳고 싶다는 말도 들려왔다. 먼저 일어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에도 출산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출산을 경험한 여자들에게 출산은 보통 ‘죽다 살아난 경험’으로 회상되는 강렬한 기억이었다. 그 고통을 알 수 없는 나로서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다만 나는 출산보다 더 아프다는 대상포진에 걸려본 적이 있다. 그렇다고 출산의 고통을 이야기하는 이들에게 나도 그 비슷한 고통을 안다고 끼어들 수는 없었다. 출산을 안 해본 나는 평생 절친이 된다는 조리원 동기도 없다. 여자들에게는 ‘남자들의 군대 이야기’ 같은 출산 이야기에 나는 공감하지 못한다. 


아이 없는 삶이 특권일까 박탈일까. 나는 오늘도 아이 없는 삶이 준 특권과 박탈 그 사이를 오가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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