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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스 Feb 07. 2020

아이 없는 여자가 생각하는 '입양'

“입양을 하세요. 살면서 자식은 키워 봐야지.”

나는 그때 관심 있던 분야를 배우려고 한 강좌에 참석하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수업이었고 오래 다녔기 때문에 안면을 익힌 분들이 꽤 있었다. 그날따라 수업에 늦었던 나는 늘 앉던 자리에 앉지 못하고 뒷줄 낯선 얼굴들 사이에 앉게 되었다. 수업 참가자 대부분이 여성이었다. 쉬는 시간 60대 정도로 보이는 어르신이 내게 말을 걸어오셨다. “아기 엄마는 아이가 몇 살이에요?”

“아이가 없어요. 아직.. 병원에서 이상은 없다는데..”  에둘러 상황을 설명하려던 찰나, 그분께서는 충고하나 하겠다며 직진해 오셨다.


 ‘입양’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갑작스럽게 마주한 단어였다. 그때까지는 입양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 나는 30대였다. ‘임신할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하기엔 일렀다. 입양을 생각한다는 것은 임신을 포기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었기에, 당시엔 담아두기 힘든 단어였다. 어르신이 베푸신 불편한 친절에 나는 수긍도, 거부도 하지 못했다.




혈연관계 개념이 강한 우리나라는 입양아들이 갈 곳이 없어 해외입양의 수가 많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미국 같은 경우, 해외입양을 하는 가정이 많다고 들었다. 오래전이지만, 배우 안젤리나 졸리는 자녀가 있음에도 동남아시아에서 여러 명의 아이를 입양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자녀가 있었던 배우 신애라 씨도 두 딸을 공개 입양했고, 방송을 통해 입양에 대한 긍정적인 의미를 여러 차례 환기시키기도 했다.


얼마 전 방송에서 배우 박시은 진태현 부부의 이야기를 보았다. 이 젊은 부부는 보육원 봉사 활동으로 오랫동안 알고 지낸, 대학생 딸을 입양해서 화제가 됐다. 평생 ‘혼자’ 살아가야 할 그 친구에게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주고 싶어 입양을 결정했다는 진심 어린 고백을 들으며 오랜만에 마음 깊은 곳이 뭉클 해졌다.


시간이 흘러 나는 40대가 되었다. 2년 전쯤, 나는 가까운 분에게 입양을 권유받은 적이 있다.

“아이를 좋아하면, 입양을 생각해보면 어때요?”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고 생각한 시점에 마주한 ‘입양’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내 안으로 흘러 들어오지 못했다. 무언가를 다시 생각하고 고민하기에 너무 지쳐있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이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라면, 입양은 고려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이다. 아이가 결혼과 가정에 중요한 행복의 조건이라는 생각은 이미 내 안에서 거의 해체되었다. 현재의 삶을 충실히 살아내는 것이 내게는 더 중요하다.


 임신에 대한 희망이 희미 해져 가던 무렵, 입양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혼자 고민할 문제는 아니었다. 한 번쯤은 남편과 대화해서 서로의 생각과 마음을  꼭 확인해야 했다. 결국 입양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 같은 ‘까칠한 자’들이 가슴으로 한 영혼을 품을 수 있을까? 우리 같은 사람이 감당하기란 어림없는 일 같아 보였다. 그렇게 매듭을 지었다.


그런데 입양이라는 단어를 오랜만에 다시 듣자 마음속이 어지러웠다. 어떤 분들에게 입양은 자녀가 없는 가정에 주어진 유일한 대안으로 여겨지는 것 같다. 아이를 키워본 분들이 건네는 안타까움의 한 표현인 것 같기도 하다. 아이를 키우며 느꼈던 삶의 기쁨이 컸기에 아마 그런 말을 건네 셨으리라 짐작해본다.

 ‘다시 고민해야 하나’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이가 없는 상황을 수용했고, 나름대로 살아가고자 애쓰고 있는데, 사람들에게는 내가 여전히 삶의 한 부분을 얻지 못한 사람 구나 싶어 많은 생각이 오갔다. 이제는 아이 없는 부부도 잘 살 수 있다고 믿고 싶은데,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또 아이를 낳는 보편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분들에게 나는 아직도 무언가 비어 있는 사람으로 비치고 있나 보다.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고 넘어갔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입양은 자녀를 얻는 대안 이라기보다는, 절대적인 보호와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책임감 있는 어른들이 해 줄 수 있는 도움과 지지의 손길이다. 입양의 그 숭고한 의미를 떠나서, 그간의 고민과 고통으로 충분히 지친 내게 그런 중대한 문제를 생각하기 위해 쏟아부을 만한 에너지가 더 이상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입양에 대해서 생각해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소망했던 일들을 더 이상 바라지 않기 위해서, 원했던 것을 어쩔 수 없이 내려놓기 위해서 많은 에너지를 써야 했다. 내 마음은 사막처럼 황량하고 건조해져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품기보다는 나 자신을 살려내야 할 때다. 삶 가운데 더 의미 있는 선택을 할 수 있는 힘이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안타깝지만,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잘 구분해야 한다. 그것이 내가 나를 돌보는 최선의 길이다. 아이 없는 여자에게 입양은 가깝지만 먼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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