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의 평화로운 한때
낭중지추란 말이 있다. 송곳이 주머니를 뚫고 나오듯, 뛰어난 사람은 어딜 가든 눈에 띈다는 이야기다. 나도 그런 면이 있다. 특히 처갓집에서 잘 알려져 있다.
아내가 제주도에서 본인의 강함을 어필했듯, 나의 그 일 또한 제주도에서 일어났다.
우리 집, 처형네, 장인, 장모님을 모시고 제주도로 가족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제주도에 도착해서 차를 렌트하고, 일단 해변으로 갔다.
맑은 날씨의 제주도 해변은 너무 멋졌다. 지평선 너머까지 시원하게 시야가 뚫린 바다와 약간 짭조름한 바다의 냄새, 마음이 편안해지는 파도소리. 시원한 바람이 어우러졌다. 멋진 풍경을 카페에서 즐기기 위해서 바닷가 카페로 가는데, 잠깐 차에 갈 일이 생겼다. 가족들 먼저 카페로 보내고 나는 차에 잠시 들렸다가 돌아가는 길...
계단 높이가 달라지면, 사람이 넘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나? 나는 미드 빅뱅이론에서 들었는데, 그게 맞는 것 같다.
제주도는 여러 가지로 서울과 다르지만, 보도블록의 높이도 달랐다. 무심코 보도블록에서 내려가는데 블록 높이가 꽤 높았다. 나는 발을 헛디디면서 뚝하고 뭔가가 끊어지는 듯한 소리를 듣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발을 삐끗하는 경우는 많이 있었기 때문에 잠시 휴식을 취하면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뚝하는 소리를 들은것을 애써 외면했다. 높은 블록이 앉아있기는 편하였다. 그렇게 블록에 앉아서 잠시 쉬다가 일어났는데 걸을 수가 없었다.
많은 생각이 들었다. 처갓집과 가족여행 온 첫날 다리를 다치다니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지 않은가? 믿고 싶지 않은 마음에 멍하니 있는데,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디야? 왜 안 와?’ 왠지 걸을 수 없다고 말하면 혼날 것 같아 피해를 좀 축소해 말했다.
‘아. 다리를 좀 삐끗해서...’
‘그래? 괜찮아? 빨리 와’
마음 같아서는 가고 싶었지만, 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말할 수밖에 없었다.
‘걸을 수가 없어...’
짧았겠지만 길게 느껴졌던 침묵의 시간이 지나고, 결국 아내는 나를 구출하러 왔다.
카페까지 걸어갈 수도 없어서 근처 편의점 의자에 앉았다. 그래도, 제주도 바닷가인데 커피 한잔 안 할 수 없어서 편의점 커피를 하나 들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평화로웠다.
옆에서 시선이 느껴져서 바다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발목이 점점 부어 올라서 결국 제주도 의료현장을 경험해 볼 수밖에 없었다. 인대가 늘어났었나? 끊어졌었나? 오래전 일이라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여튼 나의 인대는 손상을 입었고 반 깁스를 하고 숙소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인대가 늘어날 수 도 있다. 하지만, 남들은 축구하다 다쳤다던가, 농구하다 다쳤다던가 하는 그런 스포츠맨 같고 멋진 이유로 다치는데, 나는 그냥 보도블록 내려가다가 다친 거 아닌가. 어쩌다가 다쳤냐고 물어보면 그냥 길가다가 다쳤다고 말할 수도 없고 몹시 부끄러웠다.
숙소로 돌아가니 아버님하고 형님이 회를 사 오시고, 가족들은 저녁 준비하느라 바쁜 와중에 나는 깁스한 다리를 쭉 펴고 그냥 핸드폰만 보고 있었다. 이런 나를 보면 혹시 화가 날 사람들이 있을까 봐 최대한 구석에 찌그러져서 있었다.
즐거운 가족여행을 짐짝처럼 함께 한 해프닝으로 끝났을 줄 알았는데, 슬프게도 그러지 않다. 이것뿐이었다면 나의 명성도 그렇게 드높아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처갓집은 충남 아산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인근에 바지락을 캘 수 있는 해변이 있다고 해서 아이들과 장모님과 함께 떠났다.
바지락을 캐는 것은 재미있었고, 너무 많이 수확한 바지락을 옮길 때는 나의 큰 힘이 큰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그날 바닷가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바닷가에서는...
집에 돌아와서 씻고 저녁 먹을 준비를 하는데, 허벅지가 점점 쓰려오는 것이다. 빨갛게 달아오르면서 아픈 것이 이건 마치... 화상?
다들 반바지를 입고 놀았는데 어째서 나만 이런 일이?
결국 민간요법으로 어머님이 감자를 갈아서 내 허벅지에 붙여주셨고, 저녁을 먹을 때 어른들이 자꾸 물어보셨다.
“자네 다리는 왜 그런가?”
그 후로도 처갓집만 가면 자주 앓아누우면서 나의 캐릭터를 확실하게 빌드업할 수가 있었고, 나의 이 명성은 널리 널리 퍼졌다.
얼마 전 연우가 화상수업으로 가족을 소개하는데 나에 대한 소개의 마지막 멘트는 이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유리 인간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