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모임 '써용'에서 추천받은 정기적인 글 공모전이 있다. 매달 주제를 주고 글을 공모한다.
오늘의 글은 공모전 주제에 맞춰 쓴 글이다.
공모전 주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주제가 "내가 버리지 못하는 물건"이라니..
난 모든 물건을 버릴 수가 없는데?!
아나바다 운동의 정신으로 살고 있는 나는 항상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쓴다.
버리지 못하는 남자와 살고 있는 정리 잘하는 아내는 이에 대해서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것 같다.
신혼 때 우리 집은 대화가 넘치는 집이었다. 물론 지금도 대화는 넘친다. 다만, 물건을 정리하는 주제에 대해서만 대화가 실종되었을 뿐.
처음 아내가 도전한 분야는 옷이었다. 왠지 많이 안 입는 옷, 유행이 지난 옷, 낡은 옷들의 처분 의사를 나에게 물어보았다. 나는 아내가 꺼내놓은 옷들을 유심히 살펴보고, 많이 입지는 않지만 입을 데가 있을 옷, 유행이 다시 돌아올 것 같은 옷, 낡았지만 추억이 깃든 옷을 다시 골라주었고, 꺼내졌던 옷들은 그대로 옷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런 일이 몇 차례 반복되자 아내의 불만은 점점 쌓여만 갔고, 어느 순간 나 모르게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퇴근하니 아내는 뭔가 집에 달라진 게 없냐고 물었다.
달라진 것 없냐는 무서운 질문.
이런 질문이 나올 때마다 항상 나의 무심함을 뽐내는 답변을 하여 많은 욕을 먹었지만, 다행히 이번 질문의 대상은 아내가 아니고 집이었다. 뭔가 알 듯하여 여러 번 집안을 둘러보았다. 이 방, 저 방 돌아다니며 매의 눈으로 집기들을 쏘아보고 있는데, 옆에서 아내가 "모르겠어? 그럼 알려줄까?" 하며 나를 자극했다. 그러니 마음이 급해져서 더 정답을 맞힐 수가 없었다. 결국 포기하고 답을 알려달라고 하니. 옷방 헹거의 옷들을 대거 정리했다고 한다.
이럴 수가
나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데... 혹시 내가 아끼는 추억의 옷들을 버렸을까 하는 마음에 옷을 찾아보려 했지만, 눈앞에 보이지 않으니 어떤 옷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렇게 나의 약점을 파악한 아내는 그 후로도 나 모르게 내 옷들을 정리하기 시작하였고, 무엇이 버려지는지 알지 못하니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다 옷이 사라진 사실을 알게 되어 왜 내 물건을 막 버리냐고 항변했지만, 뭐가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영원히 입지도 않을 옷에 대해서 무슨 미련이 그리 많냐는 답변에 조용히 정리되어 버리고 말았다.
몰래 옷들을 정리하던 아내는 점점 더 대담해졌고, 내가 있는 눈 앞에서 버릴 옷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물론, 폐기 여부에 대해 나의 의견을 묻지는 않았다.
나는 쌓여있는 옷더미에 가서 괜찮아 보이는 옷들을 몰래 원위치시키고 있었는데, 그 양이 너무 많아서일까? 아내에게 들키고 말았다. 왠지 죄 지은듯한 기분에 이 옷은 입을만하지 않냐고? 나 어릴 때 좋아하던 옷이라고 변명을 해보았는데, 아내는 그런 옷을 요새 누가 입냐고, 이제 젊지도 않아서 입고 나가면 안 되는 옷이라며 다시 빼앗아 갔다. 옷은 항상 옷장에서 제일 위에 있는 걸 집어 입는 나의 패션센스로는 아내의 패션력을 이길 수가 없었고, 공권력에 진압당하는 소시민의 마음으로 버려지는 옷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최근에는 내 정장에까지 아내가 마수를 뻗쳤다. 또 산처럼 쌓이는 버려질 정장들을 보면서 처음 직장에 출근할 때 샀던 정장, 큰 이모가 먼길 차 타고 오셔서 선물을 해 주셨던 정장 등 각자 가지고 있는 추억들을 꺼내며 정장들을 살리려고 하니 아내는 말한다.
"한번 입어봐."
입사 후 시간이 많이 흘러서인지 옷이 맞지 않거나, 10여 년 전 무한도전에서 정형돈이 자주 입었던 패션의 정점이었던 은갈치 정장은 이제는 좀 이상해 보였다. 입사 초기에 상무님이 젊을 때는 아무것이나 걸쳐도 괜찮은데, 나이가 들수록 좋은 걸 입어야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만 같았다. 추억만으로 내 옷장 한편을 채우고 있던 아이들을 이제는 보내줘야 할 때가 온 것을 깨달았고, 결혼 후 처음으로 나의 의지로 옷들을 떠나보내게 되었다.
보내야 할 때가 지났는데, 나의 미련으로 버리지 못하는 것들은 얼마나 많은가? 내 힘으로 안되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은 방법인 거 같다.
결혼 후 10년이 지나서야 이런 교훈을 얻었지만, 사람은 역시 한순간에 바뀌지 않는 법.
아내는 모를 것이다. 재활용으로 버리라고 했던 낡은 스탠드, 키보드 등은 언젠가 쓸 때를 대비해서 내가 몰래 숨겨놓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