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는 국민학교였던 초등 6학년 생활을 마칠 때 이미 나는 세상이 얼마나 부조리한가를 알아버렸다. 담임이 버젓이 나를 앉혀두고 다른 학부모에게 촌지를 받고, 한 번도 인사를 하지 않는 내 부모와 우리 집 형편 때문에 내가 반장이 된 것을 노골적으로 싫어했던 담임. 성적순으로 줘야 하는 상을 교실 인테리어를 해주고, 뻔질나게 드나들며 향수 냄새를 풍기던 엄마를 가진 늘 반질반질 윤이 나던 애들한테 줘버리는 행태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담임.
졸업을 앞둔 어느 날 나를 불러 교탁 앞에 앉으라 해 놓고는,
"너는 반장을 했으니 공로상을 어차피 받는 것이 아니냐. 상을 하나도 못 받는 친구에게 우등상은 양보하는 게 맞겠지?" 라며 내가 받을 상을 그 반질반질하던 애들 중 하나에게 넘겼던 그 사람. 내 억울함을 풀어주러 한번도 학교에 와주지 않는 부모가 원망스러워 나는 졸업식 내내 가족이 있는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고, 세상을 한없이 저주했다. <강릉가는 옛길>에 보면 내가 겪은 일과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작품을 읽으며 과거가 떠올라 얼마나 책 속의 이관모선생을 욕했나 모른다. - 하길 내 초등6학년 담임도 이OO이었다. 이름도 기억하고 있다. 이순원 작가가 1957년 생인데 그분이 겪은 일이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1970년대 말에도 일어나고 있었던 거다.
우울한 나날을 보내서였는지 이 시기에 친구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중학교 진학 후 초등학교 때 남자애들한테서 몇 번 연락을 받은 적이 있었지만 지나고 생각해 보니 친한 여자 친구들이 없다. 제일 친했던 나와 형편이 비슷했던 한 친구가 졸업하면서 전학을 가게 되어 연락이 끊어졌고 그 친구 하나가 다였나보다. 그 친구는 멀리 다른 도시로 이사하게 되었고, 우리집 전화번호와 주소를 받아 갔는데 연락한다더니 소식을 안왔다. 집안 형편이 무척 안좋았던 하지만 똘똘했던 친구였는데. 그 시절에는 집으로 전화해서 연락하거나 편지가 안오면 만날 수 없었고, 그대로 세월이 흘러가 나도 그 친구를 잊게 되었다.
세상과 어른들의 불의한 모습을 알고 중학생이 된 나는 불의를 참지 못하는 아이가 되었다. 선생님들과 맞서 싸우기도 했고, 친구들에게 '나댄다' 소리를 듣기도 했다. 지금 같았으면 왕따당하고 괴롭힘당하기 딱 좋은 잘나지도 못한 게 잘난 척하는. 그런 밥맛 없는 애가 아니었을까. 중3 때부터는 나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후 나는 항상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지냈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후에는 많은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 다니는 일은 없었다. 다들 바빴으니까. 나를 맹목적으로 좋아해 주는 친구들이 몇몇 있었다. 대학 입시를 앞에 두고 인생의 첫 고난의 시기를 보내고 있기도 했고, 어느 정도 자아가 형성되는 시기여서 내 고집 있는 행동이나 재치 있는 말들이 친구들에게 호감의 요소로 작용한 것이 아닐까. 여학교에서는 어딘지 중성적 매력을 가지고 있거나 카리스마 있는 친구들이 인기를 얻곤 하는데 나는 그런 타입도 아니고, 대중 앞에 나서는 성격은 절대 아니었다. 부끄럼도 너무 많았고. 덩치가 큰 것도 아니었고. 불의함을 참지 못해서 한 번씩 이성을 잃고 나서거나, 수학여행 때 어디서 나온 용기인지 모를 용기로 좋아하는 선생님을 향해 돌진하는 모습을 보여줘서였을까?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내 주변에는 친구들이 많았다.
대학 진학 후에는 학교 방송국 친구들과 주로 어울렸다. 학과에는 아무 관심이 없어 뒷전이었고, 동아리 MT는 참여해도 학과 MT는 가기 싫어했었다. 대학 졸업할 즈음부터 중소기업에 다니기 시작했고, 그 뒤로는 동료 직원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회사 일로 스트레스받는 부분을 공유하고 상사들을 성토하는 일에 한마음이 될 만한 사람들과 관계를 주로 맺었다. 회사 생활을 함에 있어서도 나는 주로 상사들과 싸우는 몫을 담당했다. 연차가 높아질 수록 부하 직원이 생기는데 소위 '잘못을 가르쳐줘야하는' 부하 직원들을 혼내는 것도 나였지만, 상사들과 맞서 싸워 우리에게 유리한 것을 얻어내는 것도 나였다. 그러니 나는 늘 사람들과 어울리고 문제들을 해결하느라 바빴다. 그 와중에 학창 시절의 친구들까지 만나느라 주말까지 늘 바빴던 나날을 보냈었다.
20대까지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친구였던 것 같다. 어느 조직에 속하게 되든 나와 맞는 사람을 찾고 그 사람과 친해지려 노력하고, 진짜 친구가 되고. 그런 것에 많은 시간을 쏟았던 것 같다. 다행히 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에 어려움이 없었다.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주변에 항상 많았다. '진정한 친구 딱 한 사람만 있으면 성공한 인생이다'라는 말이 마음에 와닿지 않았고, 인정하지 않았다. 친구가 이렇게 많은데 무슨 소리인가 했다.
그런데 서른이 지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특히 결혼 후에는 주로 내가 만나는 사람은 남편이 되었다. 아이가 태어나자 더욱더 나는 일과 사역과 남편과 아이에게 시간을 쏟게 되어 사실 더 많은 사람과의 관계를 이어갈 수 없게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관계의 필요성마저 희미해지고, 어쩌다 만난 친구들은 나와 너무 다른 삶을 살고 있어 통하는 대화 주제를 찾기도 어려웠다. 내가 더 이상 연락하지 않게 되기도 하고, 못하고 지나다 보니 흐지부지되는 관계도 있었다.
사십 대의 어느 날 나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아 정말, 그렇구나. 인생에 단 한 명의 친구만 있어도 성공이라는 말이 이런 것이었구나.'
하지만 친구가 없어 외롭다고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일과 사역과 가정에서 내게 주어진 업무를 전부 다 완벽하게 하고 싶었고, 남편과 아이들에 둘러싸여 있어 외롭지 않았다. 오히려 가끔은 혼자 사는 이들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어쩌다 남편이 1박 2일이라도 집을 비우게 되면 해방감이 몰려왔었다. 나만 좀 남겨두고 아이들과 함께 놀러 나갔다 오라고 채근하기도 많이 했고. 혼자 조용히 앉아 책을 읽고 싶었기에 그런 시간이 잠깐이라도 주어지면 얼마나 행복했던가. 어쩌다 주어졌기에 그리 달콤했던 것을 그때는 몰랐다.
지금은 어떤가. 지금은 남편이 없다. 나는 불안정한 상태가 되었고, 많이 외롭다. 그렇다고 어떤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야 할지 모르겠다. 남편을 잃은 후 내가 바라보는 세상에서는 새로운 분류가 생겼다. 배우자가 있는 사람과 배우자가 없는 사람이라는 두 종류로 자연스럽게 나뉘었다.
나와 비슷한 형편에 처한 사람을 만날까 생각해 봤다. 하지만 같이 앉아서 누가 누가 더 힘든지 나누고 싶지 않다. 나보다 더 꿋꿋하게 버티는 모습을 보면 내가 또 한심해 보일까 겁도 난다. 그렇다고 남편 있는 사람들은 더 만나기 두렵다. 몇 번의 만남을 겪으며 힘들었던 경험이 그렇게 나를 주저하게 한다. 은연중에 그들에게서 남편과의 어떠한 이야기도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기 어려워졌다. 오랫동안 만났던 친구들도 만나기 싫다. 내 구질구질한 삶을 보여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거리가 있는 사람들은 아예 내색도 안 한다. 모른 척한다. 그게 낫다.
친하니까 위로하기 위해 딴은 애써 하는 말들이겠지만 듣는 나에게는 모두가 상처다. 예를 들면 " 인생 안 힘든 사람 없어. 다 힘들어.", "누구나 다 한번은 가잖아.", "같이 살아도 어차피 인생 혼자야 외로운 건 다 마찬가지야." 같은. 심지어는 " 네가 승자일 수도 있어. 나이 들어서 남편 병수발에 지쳐 고생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같은 말들. 듣는 사람은 끔찍한데 서슴없이 하는 애정어린 조언들이 두렵다.
이제는 홀로서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를 동반자 삼아 남은 인생을 살아야 하나.
당장 코앞의 일들이 나의 동반자다. 지금은.
책을 읽고 수업 준비하고, 글을 쓰고, 새로운 책을 구상하고. 방학에 해야 할 특강을 준비하고,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얘들에게 뭘 해줘야 도움이 될까를 고민하는 그 시간이 나를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하는 유일한 동반자다.
외롭다. 하지만 혼자서 걸어가 보려 한다. 정 힘들고 외로울 때 찾아가면 말없이 위로해 줄 친구 한 명은 있으니 됐다. 어쩌다 내가 넘어져 버리면 손잡아 일으켜줄 친구는 있으니까 됐다. 섣불리 만나고 다시 친구가 되려고 노력하지 말자. 안 슬픈 척, 괜찮은 척은 하지 말자. 나의 동반자가 누군지 알았으니 함께 하면 된다. 오늘도 씩씩하게 살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