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어린 시절이었던 것 같다. 안방에 틀어져 있는 티브이를 관성적으로 보던 시기였다. 문어의 삶을 그린 다큐멘터리였는데 내용이 자세히 기억나진 않는다. 검푸른 바닷속에서 짙은 붉은색을 띠며 물속을 표표히 나아가는 문어의 모습 한 장면. 어미 문어는 알을 품는 기간 동안에 먹지도 못하고 부화하기만을 기다리는 한 장면. 부화되고 나서야 먹이를 찾아 나섰지만 기력이 없는 어미 문어는 과거 포식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몸을 물고기의 먹이로 내주게 되는 마지막 장면. 마지막 장면에 충격을 받은 촬영자의 방관에 분노하다가(다큐멘터리에 대해서 잘 모르던 시기였다.) 문어가 삶을 다하는 것을 티브이로 보고만 있는 나 또한 무능력한 방관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때 이후로 동식물 다큐멘터리를 잘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아기 게들과 개구리들이 도로 색을 물들일 정도로 짓이겨지는 다큐멘터리의 예고편을 우연히 보고 또다시 문어 생각이 났다. 그 다큐 역시 관심은 있었지만 감당할 수 없어서 보지 못했다.
한때 고전 읽기 운동을 펼친다며 책을 한 권 사 왔다. 책 제목을 보더니 언니는 영화로 봤다고 했다. 어차피 볼 내용이고 궁금하기도 해서 결말을 알려달라고 했다. 결말을 알아버렸기 때문에 책을 읽을 수 없었다. 언젠가 읽으리라 다짐을 했지만 한두 장을 넘기면 눈에 빤히 보이는 결말에 가슴이 미어져서 읽지를 못 하겠다. 그리하여 매년 한 번쯤 읽겠노라 다짐한 채로 가지고 있게 되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 이제 네가 울 장면이야.’라고 명확하게 알려주는 장면에는 울지 않는다. 오히려 ‘왜 내 감정을 좌지우지하려는 거지.’ 하면서 그 장면 자체를 굉장히 아니꼽게 본다. 그럼에도 가끔은 그냥 울고 싶을 땐 그 신호 자체가 고맙기도 하다. ‘자 이제 울 타이밍이야. 큐.’ 아무튼.
작년 겨울부터 시작해서 올해 여름까지. 감정은 롤러코스터 아니, 자이로드롭을 잊을만하면 탔다. 평소라면 일일 드라마가 끝나고 자리끼를 준비하는 시간에 119를 불러 응급실에 쫓아갔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과 허무함이 온몸을 덮쳤다. 그 속에서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떠도는 말은 ‘울지 마, 정신 차려.’ 감정이 북받쳐올 땐 스스로에게 욕을 하면서 억눌렀다. 생사의 기로 사이에서 고통받는 가족 곁에서 자리 하나 지켜주지 못한 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출근 준비를 하는 것, 평소처럼 웃으면서 일해야 하는 것. 시간 약속도 지키지 않고 부정적인 감정을 토해내는 이들을 담당이라는 이름 하에 위로해줘야 하는 이 모든 것에 진절머리가 났다.
정말 무사히 퇴원을 하고 어느 정도 안정을 찾게 되자마자 다른 식구가 수술을 하게 되었다. 수술할 때도 함께 해줄 수 없던 것이 미안했지만 큰 수술이 아니고,사흘이면 퇴원한다고 했다. 방심했다. 그날 밤, 간병을 하는데 밤새 괴롭다고 몸부림을 쳤다. 입원실에서 소리를 질러서 다른 환자들의 눈치가 보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괴롭다고 할 때마다 간호사를 찾아가서 진통제를 놔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너무 자주 가서 간호사에게 미안했다. 새벽 내내 자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에 그렇게 아픈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른 아침 검사를 하는데 수술이 잘못되어 배 안에 피가 찼다고 했다. 바로 재수술을 했다. 수술실 앞 전광판을 바라보며 새벽 내내 고통의 신호를 가볍게 여긴 것 같은 죄책감이 밀려왔다. 다른 환자들 간호사 눈치는 보면서 왜 정작 헤아리지 못했을까. 처음 수술을 할 때 있었다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당초 사흘 입원이 일주일 입원이 되고 나서 한시름 놓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또다시 다른 식구가 3주 동안 입원을 했다. 이때는 정말 이별을 준비해야 하는 건가 싶기도 해서 회사도 정리할 각오도 했었다. 천재일우의 기회로 무사 퇴원하고 지금은 다들 조심조심 생활하고 있다. 6개월 동안 세 번의 입원. 그중 두 번의 입원이 8월이었다.
너무 슬프면 기초적인 욕구가 상실되는 걸 경험했다. 눈물이 나지 않았고 무력감으로 시작된 감정은 점차 바싹 말라갔다. 가끔 울컥했지만 반사적으로 ‘아픈 환자도 있는데 내가 왜 울려고 하는 거지? 정신 차려.’라는 문장이 감정을 억눌렀다. 회사 스트레스로 저녁은 폭식을 일삼았는데 그때 이후로 식사 패턴이 완전히 달라졌다. 허기는 느껴지지만 먹고 싶진 않았다.
결과는 다행스럽지만 그 과정에서 내가 보인 어쩌면 너무나 미숙한 감정 대응과 소모에 지쳤다. 수많은 경우의 수를 확대 재생산하면서 허우적거렸다. 현재는 암담했고 미래는 절망스러웠다. 이런 감정의 늪을 겨우 벗어나서 돌아보면, 정말 슬픔에 초연할 수는 없는 걸까 싶다. 쏟아지는 눈물 하나에 온몸이 온 에너지가 응축되는 기분이 들어서 한번 울고 나면 일어나는 것도 버겁다. 누군가 나라는 삶의 머리채를 잡고 뒤흔드는 기분이었다.
사라지는 것과 스러지는 것 그리고 소멸에 대해서는 세련되게 받아들일 수는 없는 걸까. 어떻게 하면 감정적으로 거리 둘 수 있는 건지... 누구가 또는 어떤 책으로 학습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긴 있는 건지.... 도대체 난 언제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를 읽을 수 있는 건지.
그때의 감정을 키보드로 되새김질하면서 다시 서글퍼지는 새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