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고른 사람, 고통이 고른 사람
신이 골랐다. 적어도 그렇게 말해졌다. 신내림. 신이 사람의 몸에 내려오는 것. 신이 내려오면 몸에 이상이 생겼다. 앓았다. 밥을 먹지 못했다. 잠을 자지 못했다. 헛것이 보였다. 소리가 들렸다. 이 상태를 '신병(神病)'이라 불렀다.
신병이 오면 두 갈래가 있었다. 신을 받아들이거나, 버티거나. 받아들이면 무당이 됐다. 버티면 병이 계속됐다. 죽는 경우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대부분은 받아들였다. 받아들이는 순간 앓음이 멈추고, 무당으로서의 삶이 시작됐다.
여기서 판단을 멈추고 질문을 해야 한다.
신내림은 무엇이었을까. 종교적으로 보면 신의 선택이다. 민속학적으로 보면 무속 전통의 입무(入巫) 과정이다. 이 두 관점은 이미 많이 다뤄졌다. 이 에세이에서는 세 번째 관점에서 질문한다. 심리학적 관점이다.
신내림이 정신 질환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런 판단은 이 글의 몫이 아니다. 다만 신병의 증상이 현대 심리학의 어떤 개념과 겹치는지를 묻는 것은 가능하다.
신병의 증상을 나열한다. 환청. 환시. 식욕 상실. 수면 장애. 몸의 통제 불능. 갑작스러운 감정 폭발. 의식의 변화.
현대 심리학에서 이 증상들은 여러 범주에 걸쳐 있다. 해리 장애의 증상과 겹치는 부분이 있다. 전환 장애(conversion disorder)의 증상과도 겹친다. 전환 장애는 심리적 고통이 신체 증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마음이 감당하지 못하는 것을 몸이 대신 표현하는 구조.
천민 여성이 신내림을 경험하는 비율이 높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무당의 대부분은 여성이었다. 그중에서도 삶이 고단한 여성이 많았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성, 자식을 잃은 여성, 가난에 시달리는 여성. 이 여성들에게 신병이 왔다. 신이 골랐다고 했다. 그런데 신이 고른 사람이 대개 고통받는 사람이라면, 신의 선택과 고통 사이에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닌가.
질문이다. 답이 아니다.
만약 신내림이 극단적 고통에 대한 몸의 반응이라면, 구조가 보인다. 고통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도달하면, 의식이 일상적 방식으로는 처리하지 못한다. 처리하지 못하는 것이 몸으로 나온다. 환청, 환시, 경련. 이것을 주변 사람들이 "신이 왔다"라고 해석한다. 해석이 붙으면 증상에 의미가 생긴다. 의미가 생기면 증상이 역할이 된다. 역할이 생기면 자리가 생긴다.
무당이라는 자리.
천민 여성에게 자리가 거의 없었다는 것을 1편에서 다뤘다. 울타리도 담도 없는 존재. 그런데 무당이 되면 자리가 생긴다. 마을에서 필요한 사람이 된다. 굿을 해야 할 때, 점을 봐야 할 때, 사람들이 찾아온다. 천민이되 필요한 천민. 멸시받되 찾아오는 사람.
고통이 역할이 되고, 역할이 자리가 되는 구조. 이것이 신내림의 심리학적 구조일 수 있다.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의미가 부여되면 고통은 사라지지 않지만 견딜 수 있게 된다.
기생 시리즈에서 기생의 기술이 생존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무당의 능력도 고통에서 태어났을 수 있다. 기생은 아름다움으로 생존했고, 무당은 고통으로 자리를 얻었다. 둘 다 자기에게 있는 것을 써서 살아남은 것이다.
다만 하나가 다르다. 기생의 아름다움은 밖에서 보이는 것이다. 무당의 고통은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보이는 것으로 살아남은 사람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살아남은 사람.
무당의 몸은 자기 것이면서 자기 것이 아니었다. 신이 내려오면 몸이 신의 것이 됐다. 굿판에서 무당의 몸이 떨리고, 뛰고, 울고, 웃는 것은 무당의 의지가 아니었다. 신의 의지라고 했다.
이것을 현대적 언어로 바꾸면, 자기 몸에 대한 통제를 내려놓는 경험이다. 통제를 내려놓는 것이 때로는 치유가 된다. 너무 오래 움켜쥐고 있던 것을 놓을 때 풀리는 것이 있다.
무당의 몸에서 무엇이 일어났는지, 기록은 말하지 않는다. 무당 자신도 말하지 않았을 수 있다. 신이 하는 것이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으니까.
신이 한 것인지, 몸이 한 것인지, 마음이 한 것인지.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이 글의 몫이 아니다. 다만 질문이 존재한다는 것을 남겨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