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판의 여자들

남의 슬픔을 대신 우는 직업

by 응시

굿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아픈 사람을 위해, 죽은 사람을 위해, 마을의 안녕을 위해 굿을 했다. 의뢰인이 있었고, 목적이 있었다. 무당은 의뢰를 받고 굿을 했다. 그런 의미에서 굿은 서비스였다.


그러나 굿판에서 일어나는 일은 일반적인 서비스와 달랐다.


무당은 굿판에서 울었다. 의뢰인의 슬픔을 대신 울었다. 죽은 사람의 말을 대신했다. 죽은 아이의 목소리로, 죽은 남편의 목소리로, 죽은 어머니의 목소리로 말했다. 의뢰인이 듣고 울었다. 무당이 대신 울고, 의뢰인이 따라 울고, 굿판의 사람들이 함께 울었다.


남의 슬픔을 대신 우는 것. 이것이 무당의 핵심 노동이었다.


기생 시리즈에서 기생의 노동을 세 가지로 나눴다. 예술 노동, 감정 노동, 성적 노동. 무당의 노동도 나눌 수 있다. 의례 노동(굿의 절차를 수행하는 것), 영적 노동(신과 접촉하는 것), 감정 노동(남의 감정을 대신 느끼는 것).


이 중 감정 노동이 가장 소모적이다.


현대 심리학에서 '대리 외상(vicarious trauma)'이라는 개념이 있다. 타인의 트라우마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직접 경험하지 않았어도 트라우마 증상이 생기는 현상이다. 상담사, 사회복지사, 응급구조사에게 나타난다. 남의 고통을 반복적으로 듣고, 보고, 느끼는 직업.


무당이 정확히 이 자리에 있었다.


굿을 한 번 하는 것은 감당할 수 있다. 문제는 반복이다. 무당은 평생 굿을 했다. 수십 년간 남의 슬픔을 대신 울었다. 죽은 사람의 말을 대신했다. 한 번의 굿이 끝나면 다음 굿이 기다렸다. 슬픔이 끝나지 않았다. 마을에는 항상 아픈 사람이 있었고, 항상 죽은 사람이 있었다.


무당 자신의 슬픔은 어디로 갔을까.


이것을 묻는 기록은 없다. 굿의 절차는 기록됐다. 어떤 순서로, 어떤 노래를, 어떤 춤을 추는지. 무당이 느끼는 것은 기록되지 않았다. 무당의 감정은 무당의 것이 아니라 신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울면 신이 우는 것이고, 웃으면 신이 웃는 것이다. 무당 자신은 그릇이다. 그릇에 감정이 있는지 묻는 사람은 없었다.


이 구조가 현대의 감정 노동과 닮아 있다.


서비스업 종사자가 웃는 것은 직업이다. 고객 앞에서 화를 내면 안 된다. 슬퍼도 웃어야 한다. 자기감정을 숨기고 직업이 요구하는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 심리학에서 이것을 '감정 부조화(emotional dissonance)'라고 부른다.


무당의 감정 부조화는 더 극단적이었다. 서비스업 종사자는 자기감정을 숨기고 다른 감정을 표현한다. 무당은 자기감정을 지우고 타인의 감정을 자기 몸으로 통과시킨다. 숨기는 것과 통과시키는 것은 다르다. 숨기면 자기 안에 남는다. 통과시키면 자기가 지워진다.


굿이 끝나고, 사람들이 돌아가고, 굿판이 비면 무당은 혼자 남았다. 남의 눈물이 마르고, 남의 슬픔이 풀리고, 남의 한이 풀린 뒤에 무당에게 남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기생에게 새벽이 있었다. 손님이 떠난 뒤 혼자 가야금을 치는 시간. 무당에게도 굿이 끝난 뒤의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 시간에 무엇을 했는지는 모른다.


남의 슬픔을 대신 운 사람의 슬픔은 누가 대신 울어주었을까. 기록에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