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없는 그림책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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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이 끝나갈 무렵,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던 인민군 포로 이상철은
반공 수용소로 옮겨지기를 원했다.
그러자 같은 포로들은
그를 두고 ‘변절한 악질 반동’이라며 손가락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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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유엔군 사령부가 포로들을 대상으로 송환 심사를 진행하던 날,
이상철은 남한도, 북한도 아닌 중립국을 선택했다.
그러자 이번엔 남한 사람들마저
그를 ‘회색분자’라 부르며 외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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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 안에서 이상철의 생명은 늘 위태로웠다.
친공 포로들은 기회만 생기면 그를 해치려 들었고,
유엔 사령부는 그를 보호하기 위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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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에 남기로 한 포로들과 북쪽으로 송환된 포로들 사이에서,
이상철은 끝까지 어느 쪽도 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선택해야 할 것이 절반이었기 때문이다.
하나인 조국의 어느 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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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젊은 날, 조국의 하나 됨을 위해 전쟁터로 나섰다.
늙은 부모와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까지 남겨둔 채...
그런 이상철에게 ‘남쪽’이든 ‘북쪽’이든
또다시 절반만을 선택하는 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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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생각했다.
‘조국이 하나가 될 때까지,
당분간 중립국에서 머물다가 반드시 돌아오리라.’
이방의 땅에서 살아가는 아픔이
조국의 절반을 포기하는 고통보다는 덜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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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이상철은 판문점으로 이송되었다.
중립국을 택한 포로들을 인도에서 받아주겠다는 소식이 도착한 것이다.
그러나 막상 배를 탈 시간이 다가오자, 이상철은 두려웠다.
태어나 처음으로 조국 땅을 떠나는 데다,
이제는 조국 땅의 ‘절반’만 선택한 사람들만이
이 땅에 남을 수 있다는 현실이 낯설고 아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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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인도로 향하는 배가 도착했다.
이상철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발아래 있는, 단 한 평도 안 되는 조국 땅에 엎드려
한참 동안 목놓아 울었다.
그것이 그가 조국에 전할 수 있는 마지막 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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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천천히 배에 올라탔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조국과 자신에게 굳게 다짐했다.
'언젠가 이 조국이 하나가 되는 날이 오면,
나는 반드시 돌아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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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이상철은 인도에서 살아갔다.
사업을 시작했고, 몇십 년이 지나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다.
남북 어디든 마음만 먹으면 조국 땅으로 돌아갈 수 있는 여건도 마련되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돌아가지 않았다.
82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한 번도 조국 땅을 다시 밟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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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은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그의 조국은, 그가 죽는 날까지도
하나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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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이야기가 점점 과거가 되고 있다.
통일 이야기가 현재여야,
미래에 우리는 하나 된 조국을 보게 되리라...
한국전쟁 당시 실제 있었던 역사를 토대로
재창작한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