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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다 핀 꽃

그림 없는, 아니 있는 그림책 22

by 수형

못 다 핀 꽃




이 이야기는 일본군 ‘성노예제’의 실제 역사와

그 피해자인 김순덕·강덕경 할머니가 남기신 그림을 바탕으로 창작한 것입니다.




김순덕의 「못 다 핀 꽃」


#

어느 날,
할머니가 붓을 들어 그림을 그렸어요.


흰색 저고리에 검정 치마.

그림 속 소녀는
아마도 할머니의 어린 시절 모습 같아요.


소녀 위에
활짝 핀 꽃을 예쁘게 그리던 할머니가
못 다 핀 꽃 몽우리를 그릴 때에는
왜 그렇게 눈물을 흘리는지 알 수가 없었어요.







김순덕_어린시절.jpeg 김순덕의 「어린 시절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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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그림을 그릴 때,

할머니는 마치 아이처럼

얼굴이 환해지고

행복해 보였어요.







김순덕_끌려감.jpg 김순덕의 「끌려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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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그리다 잠든 할머니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깨어났어요.


한쪽 방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절대 가지 않겠다며
두려움에 떨고 있었어요.


아마도 그림 속 군인에게
어디론가 끌려가는
무서운 꿈을 꾼 것 같아요.






김순덕_끌려가는배안.jpg 김순덕의 「끌려가는 배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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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할머니가
친구들과 배를 타고 있는 그림을 그렸어요.


누군가 우리 할머니를
억지로 배에 태운 것이 분명했어요.


배만 봐도
무서워서 안 탄다고
울며 소리 지르는 이상한 병이
할머니에게 있거든요.






강덕경_라바울로 위안소.jpg 강덕경의 「라바울로 위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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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간 곳은
화산과 야자수가 있는 먼 나라 같아요.
거기는 너무 멀어서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아요.


할머니가 머물던 집 앞으로
군인들이 줄지어 오고 있어요.
할머니 얼굴이
잔뜩 겁에 질린 모습이었어요.







김순덕_그때그곳에서.jpg 김순덕의 「그때 그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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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그림을 그리다 갑자기
그림 속 여자처럼 엎드려 울기 시작했어요.
울더라도 이렇게 큰 소리로 우는 할머니는
처음이었어요.


괴물처럼 그린 군인이 너무 무서웠는지,
아니면 벌거벗은 여자가 너무 불쌍했는지,
그날 할머니는 밤새도록 눈물을 흘리셨어요.






강덕경_위안소에서.jpeg 강덕경의 「위안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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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보니

그곳에서 할머니 마음은

밤마다 새가 되어

고향으로 날아간 듯했어요.






강덕경_배를따는일본군.jpg 강덕경의 「배를 따는 일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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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는 것도 잊고
그림만 그리던 할머니의 모습이
조금 무서워졌어요.


배를 따는 남자 손을 그리며
부르르 떨고 있는 할머니 손을 보니
다가가서 꼭 잡아 주고 싶었어요.






강덕경_빼앗긴순정.jpg 강덕경의 「빼앗긴 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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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도록 그린
할머니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벚꽃의 탈을 쓴 군인이
할머니의 모든 것을 빼앗고 있었어요.
해골 위에서 무성하게 자란
벚꽃나무는 정말 나쁜 나무였어요.


할머니 그림을 보면
이제는 나도 화가 나요.






강덕경_분함.jpg 강덕경의 「분함」


#

일본 국기에 칼을 꽂는 그림을 마지막으로
할머니는 다시 그림을 그리지 않았어요.


언제부턴가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할머니 그림을 사진에 담아 갔어요.
어떤 기자는 할머니에게
더 많은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했어요.


하지만 그 사람은
할머니가 얼마나 고통스럽게
그림을 그리는지
전혀 모르는 말이었어요.


난 할머니가 이런 그림을 그리는 게 싫어요.






김순덕_어린시절.jpeg 김순덕의 「어린 시절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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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그리며

아이처럼 즐거워하던

할머니 얼굴이


자꾸만

자꾸만

생각나요.




*

고인이 된

김순덕 강덕경 할머니와

두 분의 그림을

소중하게 기억합니다.


일본군성노예제에 대한

일본의 책임 있는 반성과

정의로운 해결을 촉구합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알리기 위해 예술인과 함께 하면서 만들었던 이야기. 김순덕 할머니 그림은 할머니처럼 애틋했고, 강덕경 할머니 그림은 할머니처럼 강인했다. 하늘나라에서 평안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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