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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노라면 Nov 22. 2024

옛 노트에서 -장석남

사노라면의 붓 끝에 시를 묻혀 캘리 한 조각

그때 내 품에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

바람이 풀밭을 스치면

풀밭의 그 수런댐으로 나는

이 세계 바깥까지

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

만들 수 있었던가

물 위에 뜨던 그 많은 빛들,

좇아서

긴 시간을 견디어 여기까지 내려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그때는 내 품에 또한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

옹색하게 살았던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래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


옛 노트에서 - 장석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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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옛 다이어리 한 권을 열어봅니다.

십수 년 전의 다이어리인듯합니다.

날짜마다 그날의 회사일이며, 가족 행사며, 개인적인 일정과 기분들이 쓰여있습니다.

그 페이지들을 넘기니 그때 그 순간들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그래 이런 일이 있었지'

'그래 이런 기분이었구나'

지금 생각해 보면 별일 아닌 것이 심각하게 쓰인 것도 있고, 그때 참 힘들었겠구나 하며 다시 떠 올려지는 일도 있습니다.

그렇게 수첩을 뒤적거리니, 세월을 보내며, 견디며, 버텨가는 젊은 날의 내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듯합니다.


세월은 흘러 이제 그때의 수첩을 열어봅니다.

이제 내 앵두는 익었을까요

아니 어쩌면 그 익은 앵두도 이제는 떨구어야 할 나이일지도요.

시인의 말처럼, 이제는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일까요.


애태우던 그리움의 빛도 서서히 흐려지는 겨울의 초입,

세상의 그 찬란했던 모든 앵두들의 붉은빛을 추억해 보는 오늘입니다. -사노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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