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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 유혹, 친구의 이메일

by Aragaya Feb 23. 2025

나는 지도를 들여다보며 암스테르담 구도심을 천천히 걷고 있었다. 런던에서 장거리 밤 버스로 도착한 후, 호스텔에 무거운 배낭만 던져두고 먹을 걸 찾아 나선 길이었다. 유명하다는 애플파이 집에 가보고 싶었다. "헬로우!" 지도에서 눈을 떼며 고개를 들자, 내 앞에 한 남자가 "헬로우, 아 유 룩킹 포 섬씽?" 하며 해맑게 웃는다. 말끔한 행색을 보니 이상한 사람은 아닌 듯하다. "추천받은 애플파이 집이 여기 어디라 그거 찾고 있어." 남자는 내 지도를 슬쩍 보더니, 도와줄까? 하고 묻는다. 나보다 열 살? 열다섯? 살은 더 되어 보이는 선한 눈매의 남자다. 러셀 크로우를 닮았다. 유럽 배낭여행 한 달 차. 지난 며칠간은 딱히 여행 친구를 못 만들어 혼자 다니다 보니 말동무가 반가웠다. 흔쾌히 수락하고 암스테르담 사과파이 집을 같이 찾았다. 넌 어디서 왔니, 며칠간 여기 있니, 등 수다를 떨며 먹고 마시고 도시를 구경다. 남자는 캘리포니아에서 도시계획을 가르치는 교수인데, 로테르담 학회에 참석한 후 귀국 전에 암스테르담 관광을 하려고 3일 머문다고 했다.

   

"음, 난 한국서 회사 때려치우고 6개월 유럽 배낭여행 왔어. 그냥 정처 없이 발 가는 대로 저예산 여행하며 돌아다녀. 그동안은 잉글랜드 군데군데 돌아다녔고, 여기 본 다음에는 브뤼셀 찍고 파리로 넘어가려고." 둘 다 3일 일정으로 도시를 구경하는 여행자인 데다 그날 저녁 있는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바우 공연을 보고 싶어 하는 공통점도 있었다. 함께 콘세르트헤바우 티켓 창구로 가보기로 했다. 당일 취소 표를 구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맨 앞 자리표가 남아 있었고, 가격은 후들후들했다. 호스텔 도미토리에서 자는 형편에 나는 창구 직원이 말하는 가격을 듣곤 바로 인상을 찌푸렸다. 남자는 제안을 하나 했다. "나 이 공연 보고 싶은데, 혼자는 적적하니까 내가 표 2장 사서 같이 보는 거 어떨까?" 나는 10초 망설였다. "그래, 그럼 고맙게 표 받을게."


공연까지는 아직 1시간 반 여유가 있었다. 나는 예전에 호주 살던 얘기, 한국 직장 생활 썰을 풀었고, 남자는 일터 얘기, 집안 얘기를 했다. 원래 캐나다 출신인데 미국 서부에 정착하게 된 얘기, 일본계 부인과 결혼해 쌍둥이 자녀를 둔 얘기 등을 했다. 북미 사람들이 갖는 유럽에 대한 동경과 환상도 얘기했다. 초봄의 초저녁 암스테르담은 쌀쌀했다. 남자가 말했다. "밤늦게 공연이 끝날 테니 나 스웨터 하나를 더 챙겨야 할 것 같은데, 여기서 한 5분 가면 내 호텔이거든. 잠시 옷 좀 챙겨 올게." 나는 전혀 경계하지 않고 "그래"하며 쫄래쫄래 호텔로 함께 갔다. 그 모든 과정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나중에 복기해 보니 내가 뭐에 홀린 것 같았다. 아무튼 호텔 방에 들어서자 남자는 한 구석에 놓인 의자를 가리키며 잠시 앉으라고 권했다. 남자는 옷을 챙겼고, 나는 그제야 좀 뻘쭘한 상황임을 눈치챘다. 그때 남자는 내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내 무릎 위에 자기 손을 올려놓았다. 난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서서 호텔 방문 쪽으로 갔다. 남자는 내가 놀란 것에 자기가 더 놀라서 팔짝 크게 뒷걸음쳐서 반대편 창가에 섰다. "아니, 미안해. 놀라게 하려고 한 게 아니야. 정말 미안해." 나는 나간다고 말한 뒤 방문을 열었다. 남자도 따라 나왔다. "아, 정말 미안해. 오해가 있었나 봐." 남자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호텔 방을 나서 계단과 로비를 빠르게 지나치며 오만 생각이 스쳤다. '아니 뭐지, 이거. 옷만 챙겨 나온다고 했잖아. 왜 내 무릎을 만지고 그래. 아니 내가 무슨 신호를 준 것도 아닌데. 잠시만, 아무 의심 없이 호텔 방에 따라온 게 문제였나? 자긴 결혼했고 아내와 아이들과 행복하다며!!' 유부남 아녔으면 난 경계를 풀지 않았을 것 같았다. 거의 하루 종일 이어진 솔직 수다가 아녔으면 경계를 안 풀었겠지. 대학교 이름, 자기 이름, 가족관계 다 깠잖아. 


건물 밖을 나와 남자와 나는 별말 없이 콘세르트헤바우로 갔다. 남자는 말수가 확 적어진 채로 자기가 오해해서 미안하다고 10번째 '쏘리'를 추가했다. 난 한 편으론 찝찝함, 다른 한편으론 음악회를 보고 싶은 마음에 사과했으니 됐다고 괜찮은 척했다. 속으로는 황당함을 삭히고 있었지만. '너 부인은 너 이렇고 다니는 거 아니? 혹시 나 첨부터 그럴 목적으로 길거리 캐스팅한 거야? 원나잇하려고? 비싼 티켓 산 것도 꼬시려고 했던 거?'


음악회는 고전 곡 둘, 현대곡 하나로 무난했다. 알반 베르크 바이올린 협주곡은 지루했지만. 나도 드디어 콘세르트헤바우 발 도장, 귀 도장을 찍는구나 흐뭇했다.


2시간 음악회를 듣고 나는 호스텔로, 남자는 호텔로 돌아갔다. 다음 날 일찍 튤립 공원 쾨켄호프에 함께 가자고 한 후 헤어졌다. 남자는 여러 번 깨끗이 사과했고, 나는 오랜만의 수다가 즐거웠으므로 호텔 방 사건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함께 관광하기로 한 것이다.

 

그날 밤 한국에 있는 절친에게 이메일 답장이 도착했다. 특별한 내용은 아니었다. 그냥 그전에 내가 영국에서 보낸 이메일에 대한 답장이었고, 잘 구경하라는 그런 내용이었다. 친구의 이메일 답장을 받은 순간, 내 안의 뭔가 찜찜함이 해소됐다. 난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이 아냐. 나에겐 따뜻한 친구가 있고, 나를 걱정해 주는 사람들이 있어. 그날 밤 이역만리 친구의 존재가 나를 다잡아 줬다고 생각한다. 남자가 과하게 사과하고 진짜 미안해하며 거리 두기를 지켰던 그날 밤 일로, 오히려 젠틀한 남자라는 생각이 들려던 차였다. 아는 것도 많고, 얘기도 재밌고, 다음날 튤립 공원 소풍 후 무슨 심경 변화가 있을지 위태했었다. 그런데 친구의 이메일이 나를 정상 궤도에 되돌려 놓은 것이다. 나는 아직도 친구에게 암스테르담 유혹 사건을 이야기한다.

  

튤립 공원은 추웠고, 우리는 소풍 후 얌전히 헤어졌다. 남자는 일말의 기대감이 있었는지, 자기가 하루 종일 모범적으로 행동해서 이 정도면 괜찮은 사람 아니냐고 물었다. 나는 '위선자'라는 말은 내뱉진 못했지만, 속으로 남자의 부인을 안쓰러워했다.


암스테르담 하면 나는 콘세르트헤바우와 애플파이, 도시계획 교수가 생각난다. 여자들은 10대 후반부터 30대 초중반까지도 이런저런 사건과 상황에 얽혀 추근댐, 유혹, 스토킹, 위험한 상황까지 흔하게 접한다. 나와 내 친구들만 해도 이런 에피소드가 한 포대기다. 내 딸이 자라서 모험도 하고 시행착오도 하길 바라지만, 원치 않는 접촉에 단호하게 대처하고 위험한 상황을 잘 피해 가길 기도할 뿐이다.  




거장 따라 하기, 이번 편은 서머셋 몸입니다. 여러 장점과 훌륭한 글쓰기 습관을 지녔는데, 윌리엄 케인이 챕터 후반에 언급한 '인물 창조 방법'에 끌렸습니다. 명예훼손을 피하기 위한 '인물 가공'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2001년 배낭여행 중 겪은 일을 적되, 상대방 디테일은 좀 바꿨습니다.  


서머셋 몸은 자전적 소설을 많이 썼습니다. 자신이 겪은 일과 만난 사람을 소설에 반영하되 명예훼손시비에 휘말릴 수 있으니, 실제 사건, 장소, 인물의 직업 등은 바꾸거나 두 인물을 합해 하나로 만들라고 제안합니다. 에세이 쓰는 사람이면 누구나 주변인 이야기를 어디까지 써야 할지, 내 상황을 어느 수위까지 노출해야 할지 고민합니다. 모든 소설에는 자전적 요소가 들어가기 마련이지만, 수필 아닌 '소설'을 쓰는 이유는 명예훼손 이슈 때문이기도 하죠. 내 글에서 언급한 인물이 해당 글을 읽을 때 기분이 어떨지, 혹은 내가 다른 사람의 에세이나 소설에 등장한다면 기분이 어떨지 늘 살펴야겠습니다.



사진: UnsplashPedro Cun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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