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이 뚫고 나올 때

[우울증 환자 생존기] 알아 너 거기 있는 거

by 마담 J

한 동안 기운도 넘치고 많이 먹고 많이 움직이고 잠도 조금만 자고 사람들하고 웃고 떠들고 잘 지냈다. 뭔가 가만히 있지 못해서 필요시 약도 먹어가며 조울증 약도 열심히 먹어가며 잘 지냈다. 체력적인 한계가 찾아왔고, 체력적인 피곤함과 울감을 구분하지 못하기를 이삼일, 울증이 확실히 왔다. 평지에 싹이 흙을 밀어내고 올라오듯이 우울이 내 마음의 땅을 뚫고 나오고 있다. 잡초 뽑듯이 뽑을 일이 아니다. 그럴 수도 없고.


무게추가 끌고 내려가듯 내려가는 몸과 마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싹이 돋아나는 거였다. 마음과 몸의 땅을 뚫고 '나 여기 있어! 아직 살아있다고!'하는 신호.


그래. 알겠어. 너 거기있어. 너를 밀어내려는 게 아니야. 다만 같이 잘 살아보자는 거야. 극한으로 가지만 말자. 나도 살아야지. 남편과 가족과 동료들과 살아야지. 내가 살아야지 너도 살지. 우리 같이 사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 서로 돕고 살자. 너는 거기서 꽃을 피워도 괜찮아. 씨를 뿌려도 괜찮아. 같이 살게. 다만 조화롭게 살아보자. 아침이 되면, 저녁이 되면, 혼자 있는 시간이 되면 유난히 네가 더 잘 보여. 온 몸으로 느껴져. 숨도 쉬기 힘들고 손가락 하나 까딱 하기도 힘들어. 다만, 지금까지 몇 날 몇 일을 루틴처럼 세수도 하고 양치도 하고 출근하고 퇴근해서 밥도 하고 산책도 하고 약도 먹고 해서 몸을 자동으로 움직이게 해 놨더니 아직은 움직일만 해. 하지만 쉬라고 하는거지? 나 지금 힘드니까 쉬라고. 알고 있어. 나 힘들어. 그런데 해야할 일이 있는데 어떡해. 홍보물도 붙여야 하고, 참여자 모집도 해야하는데 어떡해. 몇 일만 참아줘. 몇 일만 봐줘. 곧 휴직할게. 네 얘기 많이 들어줄게.


의사 선생님이 쉬랬어. 강권했는데, 질책했는데 어쩔 수가 없어. 성격인 걸 어떡해. 혼자서 홍보물 돌리는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는데 어떻게 혼자 쉬어. 이번주만 참아보자. 그러면 쉴 수 있어 잠시나마.


너가 얼마나 나와 오랫동안 함께 했는지 내가 누구보다 잘 알아. 조증이 왔을 때 생각했어. 나의 디폴트는 울감인데 나 이래도 되나? 이번에 네가 다시 찾아오는 순간 생각했어. 또 오는구나. 그런데 나는 편안한가. 몸은 힘들지만 적응되어 있던 상태로 돌아가니 오는 평안함인가? 아니면 조증으로 들떠 있는 마음이 가라앉으니 오는 안정감인가?


너랑 함께 쉬고 싶다. 집에서 누워서 쉬고 싶어. 하지만 예전처럼 하루 종일 누워있고 싶지는 않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숨만쉬고 싶지는 않아. 나는 삶을 살고 싶어. 살아있는 동안은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겠어? 오래 살고 싶은 생각은 없어. 오래 산다고 생각하면 아득해져. 적당히, 내 남편이 건강한 순간까지는 나도 살고 싶어. 너에게 부탁할게. 우리의 친밀감에도 기한이 있다고 생각하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자. 언제까지나 절친처럼 한몸 처럼 지낼 수는 없어. 모든 인간관계에도 유효기간이라는 게 있데. 너와 나에게도 그런게 있다고 생각하자. 살아보니 오래가는 친구들은 가끔 연락하고 만나는 친구들이더라. 잘 살고 있겠거니 하다가 가끔 연락하고 얼굴도 가끔 보는 사이. 우리도 그렇게 지내보자. 조금씩 말이야.


조금만 기다려. 너와 함께 시간을 보낼게. 이틀, 사흘이면 돼. 곧 온전히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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