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도 시작이 반
본사에서 발령을 받고 온 김대리는 스마트하고 유머가 다분해 여직원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다. 나도 김 대리를 좋아했다. 친한 동료 지수에게 김대리 이야기를 빼놓지 않고 말했다. 어떤 스타일의 여자를 좋아할까? 예쁜 여자 좋아할까? 착한 여자 좋아할까? 아~ 사귀고 싶다. 등등의 이야기를 하면서 보냈다.
김대리가 발령받고 근무한지 3개월 뒤였다. 지수가 김대리와 일적으로 친해졌다며 셋이 주말에 만나서 놀자고 했다. 인천 월미도도 갔고 영화도 봤고 퇴근 후 커피도 마시고 우리 셋은 정말 사적으로 자주 만났다. 혹시 김대리가 날 좋아해서 지수를 핑계 삼아 셋이 만나는 것은 아닐까? 의구심은 들었었지만 다른 낌새를 눈치채지 못한 나에게 지수가 입을 열었다. "해정아 미아내 사실은 김대리랑 사귄지 3개월 되었어"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내 모습을 보며 미리 말 못해줘서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바보였다. 김대리와 지수의 사이를 한 치의 의심도 못하다니 내가 좋아하는 속마음이 지수를 통해 김대리에게 전달되고 둘이서 날 가지고 꽤나 재미있었겠다. 생각하니 화도 나도 쓰라린 패배감도 느꼈다. 그 이후 나는 김 대리에게 관심을 끊었다.
시간이 지나 둘 사이도 흐지부지 헤어지고 김대리는 같은팀 다른 여직원과 열애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예쁜 여자만 좋아하는 바람둥이 기질도 보였다. 여자관계로 복작하고 뒷말이 무성할 즈음 김대리는 타 부서로 전근을 갔다. 김대리의 존재는 그 이후로 잊혀지고 있었다.
변화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에 부서 이동이 있었다. 21세기를 시작하면서 만든 e-biz TFT 팀이었다. 잊고 지냈던 김 대리가 e-biz 팀장으로 난 팀원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온라인 사업 팀을 운영하는 곳이라 10개의 부서가 팀을 이루며 한 공간에서 일을 한다. 다른 팀이 일하는 동향을 파악하고 협업을 하면서 배울 점이 많은 부서였다. 웹 디자이너가 되어야겠다는 꿈을 가질 수 있었던 계기는 e-biz팀 디자인 파트였다.
잡다한 업무를 하는 내 일과는 다르게 디자인팀 직원들은 자유분방함 속에서 일을 했다. 이어폰을 끼고 일하는 모습은 충격이지만 신선했고, 팀 회식에서는 전시장이나 세미나를 간다. 너무 부러워서 디자인팀장을 설득해 따라 나선적도 있었다. 틈만 나면 직원들과 어울리며 웹 디자인 세계를 조금씩 접했다 그럴수록 공부가 미치도록 하고 싶어졌다. 없던 꿈이 생겼고 꿈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가슴이 설렜다. 안정된 직장을 유지할 것인가? 꿈을 위해 나갈 것인가? 내 인생에서 가장 고민을 많이 하고 퇴사를 결심했다.
팀장인 김대리에게 퇴사 사유를 얘기했다. 삼성의 울타리를 이야기하면서 퇴사를 반대하더니 퇴사의 뜻이 굽혀지지 않자! 직접적인 말을 했다. “너는 촌스럽고 감각도 센스도 없는데... 디자이너들이 얼마나 유능한데 네가 디자인을 하겠다는 거야” 얼핏 보면 맞는 말이긴 하지만 내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이 전부였다. 스무 여섯 해 동안 처음으로 가진 내 꿈을 김 대리의 비하 발언 따위로 고민하기엔 당치도 않는 조언이었다.
퇴사를 하고 학원을 다니면서 뒤늦은 웹 디자인 공부를 시작했다. 직장은 없었지만 꿈은 있었기에 밤샘을 밥 먹듯이 해야 하는 3D 노동일지라도 행복했다. 웹에이전시 디자인 회사를 거쳐 2005년에 잡코리아 디자인팀에 입사를 했다. 브랜드 매니지먼트를 공부하고 싶어서 홍대 대학원 3학기 수업을 들으러 간 복도에서 낯이 익은 남자 김대리를 맞닥뜨리게 되었다.
4년 만이지만 김대리도 나를 쉽게 알아봤다. 너무 반가워서 함박웃음을 건넨 나에게 김 대리의 첫마디는 “홍대 친구들이 굉장히 예쁜데 못생긴 애가 걸어오니 튀어서 나인 줄 알아봤다며” 유머랍시고 말해놓고 키득키득 웃는 모습은 변한 게 없다. 사람이 변하면 죽는다고 했었나?
광고홍보학과 신입생과 재학생들의 만남이 있었다. 논문을 쓰는 선배들 보면서 신입생들이 논문을 대비하는 뜻에서 함께하는 수업을 마치고 뒷풀이로 맥주집으로 모였다. 김대리도 내 앞자리에 착석했다. 내 명함을 쓰윽 내밀었다. 김 대리는 김 과장으로 승진을 했고 나는 웹디자이너 직함이었다. 김대리가 내 명함을 보자마자 했던 말은 “너 꿈을 이루었구나”였다. 내가 김 대리한테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동안 나를 무시하고 비하했던 김대리에게 복수심이 끌어올랐다. "김대리는 신입생이니깐 학교에선 선배라고 불러" 딱 잘라말했다. 농담이라고하기엔 너무 차갑고 냉정한 나의 말투에 김대리 얼굴이 이그러졌다. 살면서 김대리를 생각해 본적은 없었지만 우연한 오늘의 만남은 김대리에게 통쾌한 복수를 하라고 신이 내게 준 선물일 것이다.
꿈을 가지고 고민하는 사람 누구에게라도 내가 해줄 수 있는 조언은 “하고 싶은 일을 당장 시작해라”다. 꿈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시작이 반이라는 사실을 김 대리는 꿈꾸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프리렌서맘 이야기 #디자인한스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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