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경에 산다는 신선이 따로 없다. 밤새 조용히 비가 내렸다. 그 비는 아침까지 이어졌다. 아직 8월인데 강원도 산골은 벌써 추위에 창문을 닫고 잤다. 고요한 정적을 깨우는 닭울음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창문을 여니 가는 빗줄기가 고요히 내리고 있다.그 앞으로 펼쳐진 신비스러운 풍경이 나를 마당으로 이끌었다. 찰칵찰칵 사진으로만 남기기 아쉬워 영상으로도 담아봤다. 신선이 살았다는 그 신비스럽고 그윽한 풍경이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나는 오늘 아침 신선이 된 게로구나!
시시각각 변하는 운무의 춤사위와 빗소리
높낮이를 달리하는 산들 그 능선들 사이로 하얀 운무가춤을 춘다. 초록숲과 어우러져 슬로비디오처럼 갖가지 형상을 빚어낸다. 다시 집안으로 들어와 창밖으로 그 풍경을 멍하니 한참을 바라본다. 차가우리만큼 맑은 공기 새소리 빗소리온통 부드러운 자연의 소리들뿐이다. 바람도 잠재운 고요함 속에 있으니 내 마음도 청량해진다.
4월에 이곳에 농막 설치하고 파종을 시작했다. 봄부터 달려온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어쩌다 생각지도 않은 농부가 되어 멋모르고 이것저것 파종하고 심어놓았다. 제초제를 일절 사용하지 않았더니 잡초가 행복하게 자라났다. 내 눈엔 사랑스러운 풀과 꽃들이었다. 장마철이 되자 풀꽃들은 놀라운 성장력을 보이며 작물들을 뒤덮어버렸다. 처음엔 낫으로 잘라 멀칭하고 수동 농기구를 이용해 잡초를 제거했다. 매주 이곳에 올 때마다 3~4일을 잡초제거에 온몸을 바쳤다. 순식간에 옷은 땀으로 흠뻑 젖어들었다. 어느 순간 몸이 반기를 들었다. 온 등에 난 땀띠가 몸을 좀 시원하게 하고 쉬게 해 주라는 신호를 보내면 서다. 때가 되면 어김없이 비료와 농약을 사용하는 이웃 농가 눈치도 봐야 했다.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 생각한 남편이 예초기를 구매했다. 배터리를 한 번 충전하면 연속 2시간은 사용할 수 있단다.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이고 예초기 사용을 멈추고 나면 팔이 덜덜 떨릴 정도로 잡초 제거를 했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노동으로 뜨거운 여름을 보냈다.
잡초를 어느 정도 제거하고 나니 초록의 대지는 한층 드넓어 보였다. 콩종류 고구마는 고라니가 다 먹어치웠지만 감자나 고추는 주변 사람들과 나누어 먹고도 남을 만큼 충분한 수확을 했다. 고추는 약을 안치고는 안된다고 했다. 이웃 농가에서 고추 탄저병이 왔다고 대거 약을 뿌렸다. 우리 고추에도 살짝 탄저병이 왔다. 병충해 예방으로 식초와 소주 EM을 희석해일주나 이주에 한번 사용했었다. 그때 그것을 조금 더 강하게 희석해 2~3일 연속 뿌려주었다.
결과는 성공! 자연은 마음을 담아 정성과 구슬땀 흘린 우리의 손을 들어주었다. 일반화된 매뉴얼로 관행농을 하는 전문 농사꾼이 아닌 초보 농부의 승이다. 고춧가루용 빨간 고추를 거의 병충해 없이 수확한 우리와 달리 이웃 농가는 농약 살포에도 불구하고 절반의 수확량만 거두었다. 뿌듯했다. 우리는 무농약 무비료 무경운으로 자연농의 가능성을 보았다.
고라니 먹이가 되고 실패한 작물도 많지만 때가 되니 여기저기 열리는 수확물이 초보 농부에게 기쁨을 안긴다. 오이가 주렁주렁 열리고 참외 토마토 등 건강한 먹거리가 주어져 마냥 행복하다. 무성한 잡초 속에서도 죽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남은 해바라기 한 송이는 감동이다. 노란 호박꽃을 피우며 살아남더니 잡초 제거해주고 나니 열매까지 열려 자연의 신비를 느끼게 한다.
잡초를 잘라 자연 멀칭해주니 수확의 기쁨을 안겨준 작물들
지난번 왔을 때 수확해 간 감자로 일산 집에서 감자옹심이와 감자전을 맛있게 해 먹었다. 원주민인 이곳 이웃에서 만드는 법을 배워갔다. 버릴 건 버리고 취할 건 취한다. 아이들 어릴 때 자주 만들어 먹던 감자 샐러드를 푸짐하게 만들었다. 이웃들과 나누고 싶어서다. 식빵만 있으면 샌드위치로도 먹을 수 있다. 도시와 달리 빵가게를 가려면 차를 타고 나가야 하니 출발 전에 식빵도 사 갔다. 윗집 아랫집이 모여 샌드위치와 커피로 맛있는 간식 타임을 즐겼다. 그리고 저녁엔 모처럼 삼겹살 파티까지. 얼마 전 우리 밭 잡초 때문에 잠깐 서먹했던 감정들이 말끔히 지워졌다. 인생 별거 있나. 이웃과 서로 하하 호호 소박한 음식을 함께 즐기며 행복을 나누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어제는 마침 장날이었다. 아침 가는 길에 대화장에 들러 배추와 쌈채소 모종과 쪽파를 조금씩 구매했다. 간식을 먹고 삼겹살 파티 전까지 빗줄기 속에서도 사 온 것들을 파종했다. 비는 밤새 내렸고 아침까지 어어졌다. 어제 파종한 작물들이 파릇파릇 생기가 넘친다. 그 비가 종일 이어지며 오늘은 신선이 되어 쉬라며 이런 멋진 풍경을 선물로 받았다. 풍경 맛이 더해지니 야외에서 끓여 먹는 라면 맛도 일품이다. 시골로 이주해 새롭게 시작하는 삶에 대한 망설임은 여전하다. 문득문득 들었던 그러한 생각과 그간의 수고를 잊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