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 I. 그룹 비서실과 다이버
왜 바다로 가는가? 왜 산을 오르는가? 만큼 어려운 질문이다. 그 답 역시 ‘산이 앞에 있어서 오른다’란 유명한 산악인이 한 말보다 더 구체적일 수 없다. 그렇다고 바다가 앞에 있어서 바닷속으로 간다는 기계적인 대답은 너무 무성의하다.
바다엔 ‘신비감’이 있다. 인류문명 1만 년 역사 동안 남겨진 기록과 끊임없는 탐험과 관찰을 통해 인간은 지구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육지에 대해서는 99% 이상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있고 또한 이를 확실히 이해하고 있다고 자신한다. 그러나 이에 반해 바다와 해양에 대해서는 인류문명이 지금까지 밝혀낸 정보와 지식량이 아무리 많이 계산해도 10% 이내라고 한다. 그만큼은 해양은 아직까지 인간에게 미지의 세계로 남아있다.
한반도 반만년 역사 동안 ‘나만의 행복’, ‘1인칭 시점’, ‘전문화와 다양성’, ‘여유와 자유’ 등 새로움에 대한 갈망과 이를 실행하는 원동력의 변수와 요인들이 요즘만큼 다양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바다는 ‘창조적인 파괴’란 가능성과 역동성, 그리고 그 자체로 생산성을 품고 있다. 그 무한한 ‘에너지와 힘’이 반도 국가이면서 3면이 바다인 우리나라 젊은이를 우주로 불러내듯이 바다로 끌어들이는 느낌이다.
바다는 ‘칼라’가 있다. 바다 위는 파랗다고 한다. 바닷속은 파란색이 좀 짙다고 한다. 더 깊은 바다는 햇볕이 없어 깜깜하다고 한다. 바다의 색깔은 파란색 하나, 또는 수십 가지 색깔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다. 수십만 가지 색깔을 가지고 있는 육지의 삼원색 스펙트럼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삼광 색’의 범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수중촬영에 한 번이라도 도전해 본 사람이라면 ‘피사체’보단 ‘칼라’에 보다 많은 끌림이 있음을 아주 빠른 시간 내에 인정할 수밖에 없다. 색깔은 빛에서 태어나고 태어난 빛은 바닷속에선 육지보다 훨씬 다양한 모습을 나타낸다. ‘바닷속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누군가 물어볼 때, 항상 답은 ‘설명할 수 없으니 직접 들어가 보면 알게 된다’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물속의 빛 때문이다.
바다에는 우주에만 있는 ‘무중력’이 있다. 숨 쉬는 공기의 존재를 느끼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중력 역시 존재하지만 이를 체감하면서 생활하는 육지인은 별로 없다. 역설적으로 바다인은 수중에서 무중력을 통해 ‘중력’을 느낀다. 다이버들은 이를 중성부력이란 호흡 기술을 통해 바닷속 강과 숲을 내려다볼 수 있고 그 사이를 상하좌우 자유자재로 유영하는, 심한 경우 거꾸로 비행하는 조정기술로 한층 더 업그레이드하여 수중 무중력 생활을 즐긴다. 여하튼 1인당 수백억 단위의 금액을 들여 우주인이 되어야 느낄 수 있는 무중력 세계를 수십만 원으로 즐길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수중세계는 도전은 해 볼만한 취미생활이다.
수중세계는 육지 생활과는 이런저런 이유로 많이 다르다. 그래서 ‘새로움’을 느낀다. 그 새로움은 어떤 경우엔 ‘통찰력’으로 다가온다. 우선 소리가 4배가 빠르다. 물체가 33%나 크게 보인다. 빛은 굴절이 있다. 물속에 들어가는 순간 머릿속은 신기하게도 ‘백지’ 상태가 된다. 호흡기 하나에 생명을 맡겨야만 한다. 절대고요가 존재한다. 기분 좋은 긴장과 느껴보고 싶은 공포가 있다. 버리는 순간 얻음이 시작되고 얻는 그 순간조차도 버리는 과정임을 알게 해 준다. 따라서 육지인으로 아등바등 살다 보면 바닷속에 있는 것만으로도 ‘신선’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도달할 수 없는 산속의 신선 생활을 바닷속 1미터만 들어가면 바로 얻을 수 있다. 왜 안 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