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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린 Nov 11. 2024

인정 수첩

  제목은 오타가 아니다. 워낙은 인증 수첩이다. 자전거길을 달리는 동안 각 지점(인증센터)에서 인증 도장을 찍을 수 있는. 생긴 건 단순했지만 수첩의 힘은 정말 대단했다. 우리가 마지막까지 할 수 있게 만들어준 숨은 공로자라고 할까. 이 수첩은 발급부터 까다롭다. 아니, 무슨 큰 자격이 필요한 건 아니다. 다만 본인이 자신의 신분을 증명해야 발급할 수 있다. 자전거 여행길의 여권이자 신분증인 셈이다. 나는 처음에 이 인증수첩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스스로 전 구간을 달린 것만으로도 충분히 성취감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꼭 수첩에 도장을 안 찍더라도 말이다. (그렇다고 준비를 안 하자는 건 아니었지만) 그런데 달리면서 알았다. 이 수첩이 없었다면 우리는 끝까지 못갈 수도 있었다는 것을.


  무심사 고개에서였다. 고개를 이미 넘고 무심사를 지났을 때 다른 자전거 여행자가 와서 물었다. 혹시 오다가 떨어진 수첩을 못 봤는지. 못 봤다고 답을 한 후 정말 꼭 찾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 안타까움이란 이루 말로 할 수가 없었다. 긴 시간 자전거를 타면서 한 땀 한 땀 찍었을 도장들. 정말 말그대로 피와 땀으로 달리면서 하나씩 채웠을 도장들. 그것을 통째로 잃어버린 것이다. 수첩 하나가 아니라 시간과 정성을 '인증'해 줄 조력자가 사라진 셈이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각 인증센터에서 찍은 사진으로도 증명이 가능하다고 듣기는 했다. 하지만 그게 어디 수첩만 할까.)


  내가 그렇게 크게 안타까움을 느꼈던 이유는 나도 달리면서 수첩이 어떤 의미인지 크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내가 받은 포도 그림에 알맹이 하나마다 스티커가 붙을 때 얼마나 기뻤던가. 그 스티커가 어린 나에게는 인정이었던 셈이다. 자전거여행을 하는 우리에게 수첩에 찍는 도장도 인정이었다. 작은 도장 하나지만 나를 증명해줄 무언가. 이게 없었다면 우리는 달리면서 정말 큰 아쉬움을 느꼈을 것이다. 기운도 많이 빠졌겠지.


  우리 수첩의 한 면에는 국토종주를 했다고 증명해주는 (황금빛!) 인증 스티커가 붙어있다. 나도 내 수첩을 잘 보관하고 있다. 언젠가는 국토완주 그랜드슬램 인증 스티커까지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와 함께. 그런데 언제 갈 수 있을까. 음, 갈 수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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