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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밤 Oct 01. 2020

그 어떤 말로도.

외로운 길을 혼자 걷고 있는 사람에게

인간은 심장이다. 심장은 언제나 제 주인만을 위해 뛰고, 계속 뛰기 위해서만 뛴다. 타인의 몸 속에서 뛸 수 없고 타인의 슬픔 때문에 멈추지도 않는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라면 인간은 자신이 자신에게 한계다. 그러나 이 한계를 인정하되 긍정하지는 못하겠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슬퍼할 줄 아는 생명이기도 하니까. 한계를 슬퍼하면서, 그 슬픔의 힘으로 타인의 슬픔을 향해 가려고 노력하니까. 그럴 때 인간은 심장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슬픔을 공부하는 심장이다. 아마도 나는 네가 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시도해도 실패할 그 일을 계속 시도하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나. 이기적이기도 싫고 그렇다고 위선적이기도 싫지만, 자주 둘 다가 되고 마는 심장의 비참, 이 비참에 진저리치면서 나는 오늘도 당신의 슬픔을 공부한다. p28,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파주의 능이백숙 집에서 동서를 처음 만났다. 동서는 나보다 키가 십 센치는 커 보였다. 나중에 조카가 태어난다면 나는 분명 큰 엄마인데 짜리몽땅하고, 우리집 애는 엄마보다 큰 작은엄마라 그러겠네 생각하며 속으로 피식 웃었다. 호리호리한 체형에 분명 많이 먹는 사람 같지는 않았는데, 어른들 앞이라 그런지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누군가를 배려하는 사람의 모습인 것 같아 처음부터 마음이 갔다.


동서는 두 살 어린 나에게 깍듯했다. 처음부터 나를 형님이라고 불렀다. 나는 그 어색한 호칭에 어쩔 줄 몰라하며 한동안 그이를 '동서님'이라고 불렀다. 말수가 없던 동서가 힘겹게 입을 열어 건넨 첫번째 부탁은, 제발 자기를 님 떼고 동서라고 불러달라는 것이었다. (질세라 나도 그놈의 불편한 '님'자를 떼어버리려 했지만 실패했다. 형님은 형이 될 수는 없는 구조였다.)

배우자의 집안 내 서열에 따라 형님 동서가 정해지는 구닥다리 관습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는 자칫 데면해질수도 있었을 우리 사이를 쿨하게 정리해 준 동서가, 고마웠다.


동서는 과일을 예쁘게 깎았다. 과일을 깎을 때만큼은 일식 요리사의 칼솜씨가 부럽지 않았다. 들어 보니 동서는 어릴 적 달리기를 잘 해서 계주 대표도 했다고 했다. 나는 요리는 좀 늘었음에도 과일 깎기나 모양 내는 데에는 형편없었다. 재능이 없었다. 달리기는 익히 언급한 대로 나의 아픈 손가락이고 말이다. 내게 부족한 것을 모두 가진 사람, 큰 키까지. 동서는 멋진 데가 참 많은 사람이었다.


삼촌은 철딱서니 없는 막내아들이었다. 돈을 버는 다 큰 아들이 어머님의 환갑 생신에도 밤새 술을 먹고 숙취에 시달리며 빈손으로 나타났으니, 아무리 부처님같은 우리 어머님이라도 서운하실 만했다. 명절이면 삼촌은 낮에는 소파와, 밤에는 친구들과 어울렸다. 설거지며 그릇 정리를 도와주던 살가운 우리 도련님은 어디에. 나는 배신감을 느꼈다.


장가를 든 뒤 삼촌은 명절이든 무슨 날이든 주방을 떠나지 못했다. 토끼 같은 아내가 고생이라도 할까, 전전 긍긍했다. 동서는 그런 삼촌에게 흔쾌히 설거지를 넘겨주었다.

주방에는 얼씬도 않던 아들 둘이 번갈아 설거지를 자처하기 시작하자 음식을 만들며 이미 지쳐 있던 여자들은 수고를 덜었다. 자연히 집안 분위기도 좋아졌다. 껍데기는 가고, 드디어 민주화의 봄이 온 것 같았다. '여자 둘이서 으쌰으쌰 해보리라. 이 부엌에선 내가 선배니까 친절하게 알려주고 도와주리라!' 마음 먹었던 나의 각오는 촌스러워 갈 곳을 잃었다.


동서는 그 예의 바른 모습으로도 할 말은 하는 사람이었다. 먹지도 않는 전, 올해는 조금만 하자시며 어머님이 건네신 거대 양푼을 받아든 동서는 "이것도 충분히 많은데요?"라는 정확한 분석을 내놓았다. 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소심한 나는 동서의 조곤조곤한 걸크러쉬에 또 한 번 반해버렸다. 


차례 준비 틈틈이, 오붓한 주방에서 우리는 젯상에 올릴 대추도 씻어 먹고 밤도 깨물어 먹으면서 수다를 떨었다. 밤이면 맥주나 막걸리를 사다가 마시기도 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내가 명절을 맞은 며느리라는 사실을 잊었다.

시할머니가 돌아가신 올 여름 장례식장에서도 우리는 여고 단짝마냥 꼭 붙어 다녔다. 큰고모님께서는 우리 사이가 샘이 난다며, 아들 하나밖에 낳아주지 못해 며느리한테 미안하다는 우스갯소리까지 하실 정도였다.




삼촌과 동서는 연애 기간이 길지 않았다. 여유 있는 신혼을 보내고 아이를 가질 계획인 듯했다. 서로가 애틋한 이 다정한 부부는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 둘을 닮은, 삼촌보다는 동서를 닮은 예쁜 딸아이가 찾아와주기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기다림은 생각보다 길어졌다. 젊고 건강한 엄마 아빠였기에, 인공수정 단계에서 쉽게 끝날 줄 알았던 시도는 어느새 몇 배 힘든 시험관 시술로 이어졌다.

누구네는 시험관 시술로 아이를 낳았다더라. 요즘은 난임 부부가 많아 정부에서 시험관 시술 비용을 지원한다더라.. 이미 수없이 들어온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때까지 나는 시험관 시술이 어떻게 이루어지며 한 번의 시도에 얼마나 큰 돈이 드는 일인지, 정부 보조금이 전액 지원인지, 일부 지원인지, 몇 차례까지 지원인지, 아무것도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다. 아기를 기다리는 그 과정이ㅡ누구보다 여자에게ㅡ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든 것인지에 대해서는 더더욱이 알지 못했다.


낯선 장례식장에서 시조모님의 상을 치르면서도, 동서는 알람이 울리면 조용히 내려가 차 안에서 혼자 배에 주사를 놓아야 했다. 훤히 들여다보이는 영업용 냉장고에 주사제를 보관해야 하는 상황도 그녀에게는 당황스럽고, 괴로운 일이었다.


자연임신이 되었던 적도 있었다. 처음으로 흐릿하게 비친 두 줄을 보았을 때 동서는 행복해 했다. 그녀가 들뜬 마음으로 알려 주었던 출산 예정일은, 벌써 한참 전에 지나 버렸다. 나는 그 생각을 하면 아직도 마음이 시리다.


네 번째 시도. 이번에는 모두가 이상한 기대에 사로잡혀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난임으로 가장 유명하다는 병원에, 높은 성공률을 자랑한다는 최고의 의사선생님이라고 했다. 상갓집까지 가서 그 고생을 한 덕인지 난자도 그 어느때보다 많은 15개나 나왔다. 이번에는, 꼭 될 것만 같았다.


꿈을 꾸었다. 무슨 날이었는지 모르지만 가족들이 시댁에 모이는 날이었고, 나는 상가들이 즐비해 있는 역 근처 거리에 나와 있었다. 꿈 속의 나는 빵을 좋아하는 우리 동서에게, 빵을 사다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제대로 된 빵집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가까운 곳에 프랜차이즈 빵집은 하나 있었지만 동서가 좋아하는 빵은 그런 흔한 빵은 아닐 것 같았다.

나는 맛있어 보이는 빵을 찾아 골목을 돌아다녔다. 그런데 괜찮아 보이는 빵집은 휴일이라 문을 닫았고, 문을 연 빵집에 들어가면 빵이 없거나 맛있어 보이지 않는 빵만 남아 있는 것이었다. 결국 몇 시간을 돌아다니고도 먹음직스런 빵 하나를 구하지 못한 나는 터덜 터덜 집으로 향했다.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다. 그리고 저 멀리, 혼자 걷고 있는 동서가 보였다. 동서는 그 비를 쫄딱 맞으며 서 있었다.


어머님을 통해 소식을 전해들었다. 그 잘난 병원에서, 배아 하나를 살리지 못해 이식조차 해보지 못했다는 거였다. 그토록 자신 만만하던 의사 선생은 미안해하기는 커녕, 그 상황에서는 누구도 받아들일 수 없는 어떤 팩트들을 들이대며 내 동서의 마음을 더 무너지게 만들었다. 이야기를 전해 듣는 내 마음도 어딘가 욱하고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어머님은 상처받은 두 사람에게 이번 명절에 오지 말 것을, 어디로든 떠나 마음을 정리하고 돌아올 것을 권하셨다. 놀랍지 않았다. 우리 어머님은 그런 분이시리라는 걸 나도 익히 알고 있었다. 동서에겐 지금 그 어떤 위로의 말보다 지친 몸과 마음을 쉬어갈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추석을 하루 앞둔 날, 동서에게 메세지가 왔다.


"형님, 내일부터 연휴네요. 이번 추석에 어머님이랑 힘드실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에요. 다음에 꼭 보답할게요." 군더더기 없는 문장들에서 내게 미안해하는 동서의 진심도, 아직까지 견딜 수 없는 어떤 마음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동서가 너무 오래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너무 가볍고 알량한 위로의 말이라서 미안하다는 말도.


나의 대답에 동서도 씩씩한 한 마디를 더했다. "저희 부부 일 때문에. 죄송한 마음이에요. 어머님 생신 때는 아무 일 없었던 듯 웃으며 만날 거니까 걱정 마세요."

오로지 삼촌과 동서의 일.이라는 말에서 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 맘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오로지 남편인 삼촌 뿐일지도 모르겠구나. 생각하니 동서가 너무 외로울 것 같아 안쓰러웠다.


나는 내가 꾸었던 꿈 이야기를 천천히 꺼내 놓았다. 그리고 소중한 존재에 아무 힘이 되어주지 못하는 사람의 무력함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무슨 꿈일까. 빵에 대해서만 며칠을 생각했어요. 그리고 오늘에서야 그런 생각을 했어요. 꿈 속에서 내가 전하고 싶었던 건 빵이 아니라 위로였나 보다. 결국 난 제대로 된 위로를 전할 수 없었다는 것도 알았죠. 게다가 동서는 빵이 아니라, 우산이 필요했던 거고요.."




나는 당신의 슬픔을 알지 못한다. 당신이 혼자 견디기 힘든 불행을 겪는 동안 나는 밥도 잘 먹고 실실 웃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당신을 아낀다. 나는 당신이 슬퍼서 슬프다. 나는 당신의 슬픔을 향해 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지금 그녀는 끝이 보이지도 않는 극점을 향하여 꽁꽁 얼어붙은 영하의 대륙을 혼자 걷고 있는 기분인지도, 모른다. 걸어갈수록 점점 처음 입고 있던 옷의 온기도, 언젠가 도달하리라는 희망도 희미해질 것이다. 따뜻한 방 안에 있는 사람이 건네는 텅 빈 위로보다는, 이전에 같은 길을 횡단했던 누군지 모를 이의 수첩을 발견하는 것이 차라리 더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그 길을 걷는 마음은 오직 그 길을 걸어본 사람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것이리라.


브런치에는 유난히 난임에 대한 수기가 많다. 그들은 그 누구에게도 쉽게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내 놓았다. 그 가슴 시린 이야기들을 읽으며, 나는 그녀들이 결코 그들 자신을 위해서만 그 어려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니리라는 생각을 했다.

외로운 길을 함께 걷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들이 남겨 놓은 발자국에 의지한 채 같은 길을 걸어갈 누군가를 위해서 그들은 썼다.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불행을 기록하는 것. 그 노력이야말로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 뛰는 심장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인간됨에 가 닿게 하는 순간이 아닐까.


따뜻한 방 안에 앉아, 나는 그 글들을 찾아 읽고 또 읽었다. 소중한 사람에게, 쓸만한 위로가 되어주지는 못할 망정 무지로 인해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과배란 유도의 부작용에 대해, 착상을 유지하기 위해 투여한다는 공포스럽도록 아픈 프로게스테론 주사제에 대해 읽었다. 이제서야 조금 알게 되었다 한들, 속절없이 비를 맞고 있는 동서에게 우산을 건넬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으리라. 웃을 수 없는 자신의 얼굴이 우리를 힘들게 할 거라고. 다시 말해 그들의 불행만 자리를 피해 주면, 우리는 모두 웃고 있을 거라고. 그들은 불행하더라도, 우리는 행복할 거라고.

하지만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당신이 행복할 때 우리도 더욱 행복한 거라고. 당신이 불행의 나날을 보낼 때 우리는 당신의 자리를 비워둔 채 당신을 걱정하고 있다고.

웃을 수 없는 당신을 보며 우리도 마냥 웃지 못한다고. 그러니까 다시 만나는 그날, 애써 웃음짓지 않아도 괜찮다고.


"동서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건 삼촌뿐이라 하더라도, 그 슬픔까지도 두 사람의 것만은 아니라는 건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웃으면서 만날 필요 없어요. 두 사람이 행복해야 우리도 더욱 더 행복한 거고, 두 사람이 불행할 때 가족 모두 두 사람을 생각하고 걱정하고 있을 거에요. 너무 외로워하지 말아요. 우리는 언제나 동서 편이에요. 힘 내요.."




올해는 대추를 오천 원 어치만 샀다. 아삭거리는 생대추는 우리 동서가 좋아하는 명절 음식이다. 올해 처음으로 이 형수님이 무려 한우로 찜갈비를 준비했는데 삼촌이 없다. 삼촌은 고기 귀신이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티가 난다고 했던가. 턱없이 늘어난 잔반과 대폭 줄어든 설거짓거리에서 그들의 빈자리를 느끼고 있는데 어머님도 한 말씀 거드신다. "뚱땡이하고 꺽다리가 없으니 영 허전하구만!" 뚱땡이는 삼촌, 꺽다리는 동서인가 보다.


이 글을 쓰고 있는데 메세지가 도착했다. "형님, 보고 싶어요." 힐링하러 왔는데 두고 온 가족들 걱정에 힐링이 안 된단다. 나는 형님답게 어허 그러면 안 된다, 그러면 헛일이다 타이르면서도 외치고 만다. "동서...(울먹울먹), 보고싶어요..!” 우리는 이제 다시는 명절에 헤어지지 않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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