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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밤 Oct 05. 2020

신입사원 남부장 이야기

라떼와 꼰대 사이

그 시절 내가 회사에서 맡았던 가장 중차대한 업무는 2주에 한 번 돌아오는 간식 메뉴를 정하는 것이었다. 간식비를 걷고, 독촉하고, 예산을 알뜰하고 투명하게 관리하는 것도 나의 업무였다. 신입사원이었지만, 간식에 대해서만은 초월적 권한을 가진 '간식 부장'으로 한 방에 승진한 것이다. 처음 나에게 업무를 물려주신 선배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대충 피자 한 번, 치킨 한 번 시키면 돼. 걱정 마." 


하지만 열정 넘치는 신입사원이었던 나는 새로운 간식, 혁신적인 간식,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간식을 준비하기 위해 머리를 짜내고 또 짜내었다. 화요일의 간식 타임이 화요 미식회가 될 수 있도록, 나의 역량을 총 동원했다. 우선, 간식비를 걷는 파일에 앙케이트 종이를 붙여 절대 다수의 취향은 물론 몇몇의 까다로운 식성까지 파악한다. 배달이 되지 않는 음식을 구하러 점심 시간에 밥을 굶고 지하철을 왕복해 다녀온 적도, 호두 파이가 먹고 싶다는 소수의견을 위해 유명한 베이커리에 전날 미리 들르기도, 더운 여름 땡볕을 걸어 이십 몇 인 분의 음료를 사러 나간 적도 있었지만 간식 시간이 끝난 후 메신저로 속속 날아드는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라는 한 마디면 그 날 하루가 얼마나 뿌듯하고 으쓱해졌는지 모른다.


회사를 나오며 나는 맡고 있던 업무들을 차례 차례 넘기고 나누어 주었다. 누구라도 나보다는 나으리라 믿었기에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간식 부장으로써의 열정만큼은 누구도 나를 따라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화요일 오후의 한 시간, 그 시간만큼은 모두를 설레고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던 나의 뜨거운 열정만은, 누구도 대체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니 뒷일이 걱정스럽고 안타까웠다.


그럼에도 꼰대 부장이 될 수는 없었기에. 그동안 모아온 각종 쿠폰이며 전화번호, 자식같은 메뉴들의 목록을 넘기며 나는 언젠가 나의 선배님이 해 주셨던 그 말씀을 그대로 전했다. "대충 피자 한 번, 치킨 한 번 시키면 돼. 걱정 마요!" 


잘 되어 봐야 내 회사도 아닌 직장생활에서 맡은 일에 열정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하지만 열정을 강요하는 순간, 그는 꼰대가 되리라. 짧은 직장생활을 마치며, 신입사원 남부장은 귀한 깨달음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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