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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찹쌀부꾸미 Apr 07. 2021

나는 흔들리는 마흔이다




 퇴원이 미뤄지고도 열은 잘 가라앉지 않았다. 낮에는 미미하게 가라앉다가도 해가 지고 나면 다시 열이 치솟았다. 양 옆구리의 얼음주머니는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물컹거리며 녹아버렸다. 불덩이 같은 몸을 식히려고 나는 밤마다 환자용 원피스 바람으로 수액 거치대를 끌고 복도의 잘 닫히지 않는 창문 곁에 앉아 하얗게 쌓인 눈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올 겨울은 유난히 눈이 자주 왔고 잘 쌓였다. 벌어진 창문 틈으로 축축하게 먼지 섞인 눈 냄새가 났다. 


 차가운 밤공기를 몸속에 밀어 넣으며 내 나이를 거쳐 간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감상에 젖거나 청승을 떨고 싶었던 건 아닌데 자꾸만 그렇게 서글퍼졌다. 몸과 정신은 연결되어 있다는 게 맞았다. 약해진 몸의 나는 이런 상태로 마흔 살이 되는 내 자신이 누구보다 염려되고 딱하기까지 했다.


 몇 년 전 회사에 있을 때 앞자리 실장님이 마흔이 되며 기분이 널을 뛰었던 게 기억났다. 마흔 뭐 별거야? 그냥 숫자 바뀌는 건데 뭐? 하루는 그렇게 자신을 응원하던 사람이 다음날엔 난 끝장이야. 마흔인데 남자도 없고 애도 없어. 주변 공기까지 저 아래로 가라앉히는 흑마술을 부렸던 것이다. 요동치던 기분은 생일이 가까워올수록 점점 히스테릭하게 변해 옆에서 지켜보던 나는 뭔가 조치를 취해야겠다 생각했다.


 실장님의 생일에 작은 꽃 화분을 선물했다. 내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식물은 ‘오늘 태어난 지 1년 되었으니까 꽃을 피워야지’, ‘내년엔 가지를 두 개 더 뻗어야지’ 그렇게 사람이 정한 시간에 맞춰 살아가지는 않으니까. 그냥 살다보면 밉살스러운 곳에 곁가지도 뻗고 어느 날 새순도 나고 꽃망울도 틔우고 하는 거니까. 그렇게 살아갈 뿐이니까. 마흔이라는 숫자에 괜한 힘을 부여할 필요 없다는 메시지였다. 그 하얗던 꽃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을 못하는 걸 보니 의미에 치중해 꽃을 고르는 데에는 쏟을 여력이 없었던 것 같다.


 감정 과잉 상태였던 실장님은 과하게 감동했고, 꽃은 오래 못 살고 시들어버렸다. 우리들 중 누구도 시들어가는 생명을 살릴 금손은 아니어서 그냥 그렇게 소임을 다했다 생각했다. 성난 바다를 잠재우는 제물처럼.






 숫자에 괜한 힘을 부여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여전하다. 눈가나 입가의 주름이 서른여덟에 갑자기 뿅 이때다 하고 나타난 것이 아니고, 흰머리가 서른다섯과 함께 형벌처럼 돋아난 것은 아닐 테니. 마흔이라는 이유로 들이닥치는 상징적인 일 같은 건 없을 것이다. 


 살아가는 걸 감당할 준비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내게 일어나는 일들, 내 몸에서 벌어지는 일들, 나를 둘러싼 주변의 모든 것. 무슨 방법으로도 나눌 수 없이 오롯이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것들.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만약 있다면 넘어져 울 일도, 사랑을 잃고 식음을 전폐할 일도, 실패에 몸부림칠 일도 없겠지. 


 늦어지긴 했지만 아주 춥고 맑은 날 나는 결국 퇴원을 했고, 두 배로 짙어진 수술 자국에 흉터 재생 약을 바르며 해가 바뀌고 마흔이 되었다. 한쪽 난소와 나팔관이 사라진 몸은 지난번처럼 서서히 회복되며 다음 단계를 재촉했다. 그 어느 것도 단계를 훌쩍 뛰어넘어 다가오지는 않는다. 허리가 제대로 펴질 만큼 회복되면 소화할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나고 제대로 영양소가 공급되면 다리를 들어 올릴 힘도 생긴다. 그렇게 조금씩 다음 단계를 준비하며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늘려가는 것이다. 사는 것도 똑같지 않을까.  



 나이를 먹는다는 건 둥글어지는 것, 딱딱해지는 것 양쪽 다다. 둥글고 단단해진다. 나 자신을 감당할 방법을 그렇게 조금씩 단련한다. 


 不惑. 흔들리지 않는다는 보장은 할 수 없지만 그 노력이 왜 필요한지는 깨닫게 되는 그런 나이. 몸속에 자라난 물혹이 상상하던 물 같은 형태가 아니어도 그러려니 해야 하는 나이. 다음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 새카맣게 몰라도 손을 까딱이며 짐짓 여유를 부리고 속으로는 침을 꼴깍 삼켜야 하는 나이. 아무리 두텁게 쌓인 눈도 기다리면 녹아 봄이 오는 것만은 변하지 않는다는 걸 신념처럼 새겨야 하는 그런 나이.


 오늘도 흔들림 속에 조금 더 닳아 둥글어졌길, 그렇게 자꾸 굴러 단단해졌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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