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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찹쌀부꾸미 May 03. 2022

악몽의 밤

예측이 불가능한 일들을 기꺼이 받아들이기



 모래사장도 없는 바다였다. 가로 길이가 끝도 없이 긴 통유리 너머로 내려다 본 바다는 건물을 부술 듯이 거칠게 일렁였다. 바다 먼 쪽 하늘과 맞닿은 곳이 심상치 않아 창 밖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검은 물감을 떨어뜨린 것처럼 빛을 등지고 번져오는 어둠의 속도가 너무 빨랐다. 생각의 속도보다도 빨랐다. 아무리 흐린 날이라도 바다가 이렇게까지 검을 수 있나. 가까스로 그런 생각 하나를 떠올렸을 때 파도 사이사이로 불길한 등지느러미들이 보였다. 미간에 힘을 주고 자세히 내려다보니 물속에 사람 키만 한 물고기들이 가득했다. 검붉고 긴 녀석들은 그 큰 바다도 비좁은 양 저들끼리 거칠게 뒤엉키고 몸부림쳤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저렇게 큰 물고기들이 난리법석을 떨다가 건물에 자꾸 부딪히기라도 하면 점점 약해져 무너져버릴지도 몰라. 도망갈 수 있을까. 난 수영도 할 줄 모르는데. 검은 물고기에 내 피부가 스치는 상상만으로도 다리에 힘이 풀려버리는데. 그 때 저 멀리 방파제 쪽에 유람선만 한 물고기가 두 마리 나타났다. 이 놈들의 대장 격으로 보이는 두 마리는 물 밑에서 요동치는 나머지 녀석들과 달리 몸통의 절반 정도만 물에 담근 채 말 그대로 배처럼 유유히 나아가고 있었다. 문득 두 마리가 서서히 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놀랍게도 얼굴이 있었다. 정확히 사람의 얼굴이라 할 수는 없지만 사람의 그것과 닮아 있긴 했다. 눈코입이 있어야 할 자리에 조금은 기괴한 형상의 눈코입이 정확히 있었다. 그렇게나 먼 거리에서도 알아볼 수 있었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두 마리는 거대한 몸을 위엄있게 천천히 틀어 내 쪽으로 곧장 헤엄치기 시작했다. 바다를 꽉 채운 검은 물고기들도 더욱 심하게 요동쳤다. ‘끝났다’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뇌 속에 찬바람이 이는 듯 했다. 끝까지 내 시선을 따라잡는 거대한 물고기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오고 거대한 굉음과 함께 나는 검고 차가운 물에 영원히 갇히게 되었다.


 누구에게나 반복되는 악몽의 단골소재가 있다. 내게도 몸서리치며 눈뜨게 만드는 몇 가지 소재가 있다. 하나는 사방이 무방비로 탁 트인 곳에 엉성하게 설치된 일인용 샤워실에서 굳이 굳이 샤워를 하는 것. 보통은 얄궂은 방수천이 겨우 허벅지 정도까지만 가려지게 둘러있고 다리는 훤히 드러난 상태이거나, 샤워를 하고나서 걸칠 옷이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아 단단히 마음먹고 애써 태연한 척 거리로 나서는 등의 괴로운 디테일들을 그때그때 수반한다. 수치심의 끝판왕이랄까. 


 또 하나는 앞서 길게 늘어놓은 꿈처럼 검은 물 밑 거대한 물고기와 마주하는 것. 어릴 때의 기억을 끄집어내자면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꼬꼬마 시절 63빌딩 수족관에 간 게 화근이었다. 아마존 강 밑을 재현한 수조 앞을 지나는데 운이 좋았던 건지 나빴던 건지 마침 방송이 나오며 폭우가 쏟아지는 아마존 강을 실감나게 표현해줬다. 한층 어둑해진 수조 속을 단단한 껍질의 거대한 물고기들이 정신없이 헤엄치기 시작했다. 이름은 피라루쿠. 그날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잊어본 적 없는 이름. 가까이 올 때마다 위협적인 붉은 무늬가 선명했다. 이윽고 먹이까지 투입되자 여의도 한복판의 그 작은 수조는 아마존 야생이나 다름없었다. 서로 뒤엉키듯 헤엄치며 먹이를 먹는 피라루쿠들에 기가 질렸다고나할까. 나는 쓰러지기 직전이었는데 좋은 구경거리를 자식에게 보여줄 수 있음에 다소 고양된 기분의 아빠는 나를 수조 앞에 앉혀놓고 기어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새파랗게 질린 얼굴 뒤로 검고 붉은 무늬의 거대한 피라루쿠가 지나가는 공포의 순간이 박제되었다. 그날 이후 가끔 피라루쿠가 등장하는 악몽을 꾼다. 때로는 집채만 한 사이즈로 나를 얼어붙게 하기도 하고, 때로는 떼를 지어 컴컴한 물과 함께 나를 덮친다.



 꿈은 너무나 랜덤해서 마음먹은 대로 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딱히 그날의 기분이 반영되는 것도 아님을 되풀이해서 깨닫는다. 악몽을 꾸기 싫어 발버둥 쳐봤자 생각지도 못한 어느 날 홀연히 툭 치듯 다가온다는 거다. 라벤더 오일 한 방울이 무슨 소용이고 폭삭한 거위 털 베개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잠에 집착하다보니 수면에 관한 책을 굉장히 많이 읽었는데, ‘꿈’에 관해서는 일부러 피해가며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두었다. 그 기묘한 심뽀는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우주를 떠올리면 그저 신비로워 자세히 알고 싶지 않은 것. 왠지 광년이 어쩌고 빅뱅이 어쩌고 하는 우주가 품은 무수한 원리와 이론을 한 톨도 건드리고 싶지 않은 마음. 우리에게 와 닿은 별빛이 얼마나 오래 전 그 별을 떠난 빛인지 계산하는 일 따위 내게는 없으리란 얘기다. 이과 감성이라고는 눈 씻고 찾을 수 없는 인간이라 그럴 수 있다. 방대한 실체를 낱낱이 짚어가며 알아가지 않아도 그저 두루뭉술하게 떠올리는 것만으로 생각할 거리를 많이 가져다주는, 그 느낌이 좋아서 미지의 영역으로 두는 것이다. 꿈도 그렇다.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머릿속을 떠다니는 생각 중 어떤 것들이 짜집기가 되어 이런 내용으로 변형이 되는지 알게 되면 내가 꿀 꿈에 대한 기대감은 몽땅 사라지게 될 것 아닌가.


 무작위로 영화를 상영해 준다. 어느 날은 빼먹고 안 틀어줄 때도 있다. 맹숭맹숭하기만 한 짤막한 드라마일 때도 있고, 기분 좋은 코미디일 때도 있고, 간혹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끔찍한 호러물일 때도 있다. 돈을 내지 않아도, 아무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영화는 상영되는데 내 취향은 멜로라 멜로만 볼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려 애쓰면 가끔 만나는 초대박 액션물이나 판타지를 놓치게 될지 모른다. 굳이 가치로 따지자면 안전하게 오로지 내 취향의 무언가만 가질 수 있는 것보다, 무수히 많은 선택지 속에 우연히 만나는 즐거움을 위해 마찬가지로 우연히 만날지 모르는 두려움을 감수하는 편이 낫다는 거다. 물론 우리에게는 내 취향의 꿈만 꿀 수 있는 확실한 방법 따위 없지만…


 우리는 악몽에 맞설 대대적인 대책을 세우지 않는다. 머리끝까지 한기가 들어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떴어도, 쿵쿵 울리는 심장 쪽에 손을 얹고 조금 가라앉힌 뒤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할 뿐이다. 설령 다음 날까지 선명히 생각날 만큼 공포스러운 꿈일지라도 시간이 좀 더 지나면 결국엔 흐려지고 만다. 그걸 알기 때문에 매번 악몽 앞에서는 초연하고 담대해지는 것이다. 오늘 꾸게 될 꿈이 어느 장르일지 몰라도 지레 겁먹지 않는 것이다.


 살면서 생기는 나쁜 일들을 요리조리 피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예측이 가능한 나쁜 일들도 있고 사고처럼 불쑥 찾아오는 나쁜 일들도 있다. 심지어 아무리 단단히 준비했어도 꼭 생기고 마는 나쁜 일도 있다. 그렇다고 늘 내 몸에, 마음에 철갑을 두르고 경계근무를 설 수는 없다. 그런 마음으로는 드문드문 찾아오는 좋은 일에도 크게 기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다시 찾아올지 모를 나쁜 일에 대한 염려 때문에 미소 한 번 짓기도 불안할 뿐이다. 


 꿈을 맞이하듯 조금 초연해질 필요가 있겠다. 어떤 꿈을 꾸게 될지 모르듯 앞으로의 삶도 어떤 일이 일어날지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이 드니, 너무 몰두해서 탐구하지도 말고 지레 겹겹이 계획을 쌓아두지도 말자. 나쁜 일이 일어나면 일어난 대로 상한 가슴 쓸어내리고,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다보면 어느새 그 일은 흐려져 있다. 나쁜 일을 곱씹고 곱씹어 선명하게 남겨두면 나에겐 바꿀 수 없는 약점으로 남는다. 그런 약점이 두툼하게 쌓이면 정말로 약한 사람이 되고 만다. 시간이 걸릴지언정 어떤 일들은 짐짓 초연한 태도로 흐려지도록 내버려둬야 한다. 그래야 좋은 일이 생길 때에도 불안함 없이 마음껏 즐거워할 수 있다.


 오늘 밤도 상상 못할 꿈을 기대하며 잠자리에 든다. 그리고 눈을 뜰 땐, 깨어있는 앞으로의 시간도 상상 못할 일들이 가득할거라고 기꺼운 마음으로 기대해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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