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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찹쌀부꾸미 May 04. 2022

낮잠이 필요해

조금은 느슨하게 살아보기



 남편은 타고나길 잠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시어머니를 닮았단다. 본격적인 수면시간도 짧거니와 중간 중간 정말 짧은 쪽잠을 자면 개운하다고 했다. 


 그는 매일 네 시간에서 네 시간 반 정도를 자고 일어나 출근 준비를 했다. 서울 밖의 회사까지 출퇴근은 꽤 걸렸고, 통근버스 안에서 부족한 잠을 보충하고 점심시간에 잠깐 낮잠도 자는 모양이었다. 그래봤자 다 합치면 6시간 남짓. 그거면 된다고 했다. 내 쪽은 타고난 잠만보라 긴 수면시간의 이유를 증명된 이론들로 무장하고 있던 터였다. 의사며 과학자며 입을 모아 성인에게 권장하는 수면 시간은 8시간이라 했다고, 그보다 덜 필요하거나 더 필요한 사람은 극히 드물고 대부분의 성인은 정말로 8시간 정도가 꼭 필요하다 했다고 몇 번이나 말해주었다. 하지만 뭐 본인도 별다른 수가 없었을 것이다. 수면 시간을 늘리면 퇴근 후의 자유 시간이 줄어들어 억울함이 배가 되는 게 평범한 직장인의 일상이니까. 남편은 자기는 대신 잠의 질이 좋아 괜찮다며 눈물을 훔쳤다. (마음의 눈으로 봤다.)


 그랬던 남편이 십년을 넘긴 회사생활 끝에 쉬어가겠다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일 년간의 휴직. 옆에서 속삭거리며 부추긴 내 입김도 한몫했다. 십 년 넘게 한 회사에서 일했는데 잠깐 쉬면서 딴 짓도 좀 해보고 한눈도 팔아보고 그럴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니. 아직 애도 없는데 휴직이 대수냐, 둘이 조금 빠듯하게 보내면 어려울 것도 없지. 무시무시한 기세로 창궐한 코로나 덕에 귀하게 얻은 황금 같은 시간에 해외여행 계획하나 세울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의 찬란한 휴직 생활이 시작되었다.


 대단한 건 없었다. 그저 삼시세끼 도란거리며 다음 끼니를 궁리하고, 커피 맛이 좋다는 카페를 찾아다녔다. 해보고 싶었다는 공부도 시작했지만 절박함은 없으니 여유롭게 쉬엄쉬엄 흘러갔다. 좋아하는 운동을 하고, 남들 일할 시간에 영화를 보고, 소소한 쇼핑을 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휴직의 가치는 충분한 거 아닌가. 회사에서 ‘자기개발휴직’이라는 명칭을 붙여둔 점이 조금 껄끄럽긴 하지만…


 새벽의 어둠 속에서 무례한 빛과 함께 진동하는 알람에 맞춰 일어날 일이 없어지면서 남편의 잠은 조금씩 늘어났다. 평생 자기는 잠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을 달고 살던 사람이, 어느 순간 나와 같이 8시간 통잠을 너끈히 자고 일어나는 것이다. 그를 알았던 처음부터 단 한 번도 지워진 적 없었던 다크서클이 사라졌다. 컨디션도 전체적으로 좋아져 운동을 하는 족족 효과가 보였다. 조금씩 끊어 자도 잠의 질이 좋아 괜찮다는 둥, 엄마를 닮아 쪽잠 잠깐 자면 금방 회복된다는 둥 하는 소리는 헛소리로 판명되었다. 역시 의사며 과학자며 공부 많이 한 사람들의 말은 허투루 들어 넘길 수 없다.



 옛날부터 시에스타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정해진 낮잠 시간이라니, 모두가 멈춰 늘어지는 시간이라니 너무 달콤한 얘기다. 글쎄, 통념적으로 우리 같은 성인에게 허락되는 낮잠은 길어야 30분 정도다. 그마저도 직장인이라면 아무리 점심을 후딱 욱여넣는다 한들 확보하기 힘든 시간이다. 엎드려서든 의자에 앉아 고개를 젖혀서든 자야지 하고 마음먹으면 바로 잠드는 사람에게는 10분, 20분의 낮잠도 꿀 같겠지만, 몸이 아무리 피곤해도 잠드는 게 오래 걸리는 사람에게 그 정도 시간은 감은 눈 사이 미간에 힘을 주고 노력만 하다 끝나버릴 것이다. 눈을 감고 쉬는 것만으로도 자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낸다고 하지만, 몸이 회복했는지 정신은 알아차리기 힘들더라. 


 왜 그리 열정적인 사람들 투성인지. 점심시간을 쪼개 샐러드를 먹고 웨이트 트레이닝를 하질 않나, 이어폰 귀에 꽂고 10분 눈감고 있었다고 개운해하질 않나. 휴직이라는 단어에는 버젓이 ‘쉴 휴’자가 들어가 있는데도 꾸역꾸역 ‘자기개발’이라는 명목을 갖다 붙이질 않나… 나 같은 느림보들에게 세상은 너무 활기차다.


 ‘앞만 보고 달렸다’는 말은 늘 달갑지 않다. 하지만 잊을 만하면 꼭 누군가에게서 그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듣게 된다. 서울 직장 생활을 정리하고 제주도에 카페를 차린 부부에게서, 물빛 좋은 바다가 펼쳐진 관광지의 누군가의 인터뷰에서, 술에 취한 친구의 푸념 속에서. 열심히 채찍질하며 살아온 노력을 폄훼하려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왜 앞만 보고 달렸지?’이다. 옆도 보고 뒤도 보고 이 세상에 구경할 게 얼마나 많은데. 강아지와 산책해보면 안다. 가만히 두면 강아지는 기분 좋을 땐 빨리도 걸었다가 멈춰 서서 꽃냄새도 맡았다가 다시 천천히도 걷고, 한참을 까치만 바라볼 때도 있다. 우리도 앞만 보고 달려서 얻은 것들을 뒤로하고, 결국 소소한 행복은 멈춰선 곳에서 찾게 되지 않는지.


 필요하면 자도 되고, 굳이 필요하지 않으면 자지 않아도 될 널널한 두세 시간이 필요하다. 아무도 그 시간을 내어주지 않으니 내가 나에게 기를 쓰고 만들어주어야 한다. 조금 늘어져도 괜찮다. 늘어지는 시간이 길어져도 괜찮다. 내게 필요한 쉬는 시간은 내가 제일 잘 아는 법이다. 눈치 없이 흐물흐물 늘어진 행복한 사람들이 도처에서 발견되는 날이 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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