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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찹쌀부꾸미 Jan 17. 2022

베개 원정대

꿈을 찾아 헤매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기



 남들은 ‘인생템’을 참 잘도 찾아낸다. 


 인생 파운데이션, 인생 귤, 인생 커피, 인생 도마… 펜 하나를 사려 해도 종류가 수천가지는 되는데 그 중에 이전으로도 이후로도 이 아이템을 능가할 것은 없다할만한 걸 만난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내게도 그런 인생템이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카시오 시계 하나 정도다. 적당한 가격에 몇 해에 걸쳐 계절과 코디를 가리지 않고 착용중인걸 보면. 타이핑을 멈추고 몇 분 더 생각해봤지만 더 떠오르는 건 없다. 나 참.


 타고난 긴장도가 높은 나는 자는 동안에도 쓸데없이 눕혀둔 미어캣처럼 목 주변을 빳빳하게 긴장시키는 재주가 있다. 그래서 누군가의 인생템이라 일컬어지는 대부분의 것들은 흘깃 보고 넘길 뿐이지만 인생베개라고 이름 붙은 베개만큼은 가격을 비교해가며 진지하게 고민해보곤 하는 것이다. 대부분은 격한 고민 과정에 지쳐 맥없이 끝나고 말지만…


 인생 베개에 대한 열망은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아직까지 가슴에 묻어둔 지나간 베개 하나에 대한 그리움에서부터 출발했을지도 모르겠다.


 크기는 가로 40센티 세로 30센티 정도. 두께는 가장 높은 곳이 8센티가 되지 않는 낮은 솜 베개다. 솜이 군데군데 단단하게 뭉친 부분이 있어 잠자리에 들기 전 베개를 이리저리 구타하고 문지르길 반복해 최대한 말랑하게 만들곤 했던 기억이 난다. 그 버릇은 지금까지 남아 아직도 나는 잠들기 전 베개를 두드려 부풀리는 작업을 빼놓지 않는다. 마치 졸린 강아지가 누울 곳을 뱅글뱅글 돌며 긁어서 다져두는 의식과 같다. (비교도 안 되는 귀여움에 빗댄 점 사과드립니다.)


 베개커버의 테두리는 진한 파란색이었다. 중앙보다 약간 오른쪽에 내가 그 당시 가장 좋아했던 캐릭터인 도널드덕이 한쪽 팔을 한껏 가슴께에 올리고 당당하게 걸음을 내딛는 모습이 꽉 차게 그러져 있었다. 뒷 배경으로는 빨간 지붕의 아담한 집들이 몇 채 들어선 마을 그림이 있었다.


 이 베개를 내가 이토록 자세히 기억할 수 있는 이유는 이 베개와 함께한 기간이 무려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일부까지를 아우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금까지도 손에 꼽을 만큼 좋아했던 베개이기 때문이다.


 처음 좋아했던 이유는 물론 도널드덕 때문이었다. 당시의 나는 고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무조건 도널드덕이 그려진 물건을 골랐다. 도널드덕이 늘 입고 있는 파란 세일러복도 맘에 들었지만 다른 캐릭터에 비해 감정 표현이 격한 점도 좋았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때쯤에는 베개가 꽤 낡았다. 솜이 뭉친 부분은 거의 골렘 주먹 수준이었고, 지금 생각하면 아마도 레이온 소재가 아니었을까 싶은 맨질맨질 미끈미끈하던 커버는 군데군데 올이 뜯기고 가장자리는 너덜너덜했다. 하지만 후줄근해진 대로의 맛이 있었다. 오랜 시간 나의 일부처럼 머리를 괴어주던 베개는 늘 최적의 눕는 자세를 만들었고, 늘 같은 정도의 표면의 서늘함을 지니고 있었다. 머리카락을 베개 위쪽으로 말끔하게 드리우고 천장을 향해 누우면 뒷목덜미에 닿던 차갑게 매끈하고 후줄근하던 그 느낌이 아직도 선하다. 말하자면 어린 시절의 애착인형처럼 그 베개를 오랫동안 포기하지 못했던 것 같다.


 자라서 철근과도 같은 흉쇄유돌근과 일자목을 가지게 된 이 인간은 결국 베개 유목민 신세를 면하지 못하게 되는데…  그러면서도 덥석 베개에 몇 십 만원을 투자하지 않는 건 어떻게 보면 모순이다. 변명을 해보자면 베개 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소비에 신중함을 갖추게 되었달까. 아니, 신중함이라기보다도 멋모르고 사제끼는 게 낙이었던 과거의 나를 수습하는 과정에 자연스레 체득한 ‘사고 나서 별로여도 땅을 치지 않을 정도의 소비 한도’랄까. 적절~한 가격으로 합의 볼 수 있는 정도의 안락한 기능을 원하는 것이다. 딱 그만큼만. 너무 지나치게 구름에 머리를 괸 것 같은 느낌은 필요 없고. 아… 그때처럼 도널드덕이 그려져 있다는 이유 정도로 덥석 시답잖은 베개를 내 인생 베개 삼아 길들여갈 순수함과 건강한 몸뚱이가 내게 남아있으면 좋으련만. 



 작은 글씨로 고백하자면 내 인생 베개를 찾는 과정은 내 꿈을 찾는 과정과 소름끼치게 닮아있다. 


 어디에다 ‘나 이런 꿈이 있어요.’하고 해맑게 얘기하기엔 겸연쩍을 만큼의 나이가 된 내가 남몰래 아직도 못 이룬 꿈을 좇듯이, 적극적이지는 않으면서 늘 가슴 한켠 염두에 두고 큰 투자 없이도 원하는 나의 모습에 적당히 가까워지게 만들 찰떡같은 무언가가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라고. 처음에는 분명 남들이 듣기에도 그럴싸한 모양새의 큼직한 꿈이었을텐데 현실에 모서리가 닳고 적당히 타협해, 둥글고 적당한 크기가 남들이 가진 것과 비슷해져버린 그런 꿈. 


  내 대신 목을 가누어준다는 몇 십 만 원짜리 베개는 내 것이 아닐 것이라 믿으며 어린 시절 도널드덕 베개처럼 몇 만 원 정도로도 평생의 기억을 책임져주는 베개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저 포도는 신 포도일거야.’ 정신 승리하는 여우를 마냥 비웃을 수 없는 게 어른인가보다. 


 나의 믿음은 항상 이렇게 소박하고 허황되며, 의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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