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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찹쌀부꾸미 Apr 17. 2022

커피는 오후 세 시 전에

나이와 함께 내게 필요한 부분들을 변화시키기



 사람은 변한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늦은 밤 홀짝인 커피와 상관없이 잠들 수 있었다. 얇게 저민 생마늘 조각과 쌈장을 회 한 점과 함께 깻잎에 싸먹으면 속이 편안했다. 취향에 꼭 맞는 새로운 음악을 발굴하는 과정이 귀찮지 않았다. 어딘가에 적어두지 않아도 기억하려고 맘먹은 것들은 잊은 적이 없었다. 얼굴에 풀 메이크업을 얹어도, 딱 달라붙는 치마를 입어도 오랜 시간 불편함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눈 떠보니 나는 생채소나 파, 마늘 같은 자극적 식재료는 소화시키지 못하고, 매일 듣던 노래만 듣고, 잊을까봐 적어두었다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리며, 밋밋한 쌩얼에 헐렁한 바지만 입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면 대부분 나이듦에 따른 변화일 뿐 내 의지가 반영된 것은 아니니 수동적 변화라 하면 맞을까.


 아무래도 아쉬운 건 커피다. 커피에 맛을 들인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이다. 이십 대에는 커피 맛을 잘 몰라 라테만 찾았다. 어릴 때부터 우유는 귀신이었다. 유치원에도 들어가기 전 이미 200ml 우유를 하루에 대 여섯 개씩 마셨고 대학교 땐 매일 500ml 우유에 빨대를 꽂아 오전 수업시간 내내 마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커피의 맛은 미지의 영역이라 내게 중요한 건 어느 브랜드의 우유를 쓴 라테인가-였다. 삼십 대 중반에 들어서야 조금씩 커피 맛을 알게 되어서 좋아하는 취향의 원두와 로스팅한 정도를 가물가물 찾아갈 무렵, 마침 유당불내증이 생겼다. 삼십 년 넘게 메마른 적 없는 유제품 사랑이 강제로 끝나게 생겨버렸다. 그 뒤로 에스프레소와 아메리카노, 아직도 미세한 차이를 모르겠는 롱블랙이라든가 룽고 같은 것으로 꾸역꾸역 우유 없는 커피생활을 하며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건만. 이제는 엎친데 덮쳐 카페인마저 버티지 못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나이와 마음은 어쩜 이리도 합이 안 맞는지. 각각에게 자아가 있어서 2인3각 경기라도 했다면 시작과 동시에 험한 꼴을 보였을 거다. 커피 두세 잔으로도 끄떡없던 나는 언젠가부터 그렇게 마시면 잠을 아예 잘 수 없게 됐다. 몸뚱이와의 미묘한 눈치싸움 끝에 하루 한 잔으로 줄이고도, 그 한 잔조차 허용되는 시간대가 점점 앞당겨져 결국 오후 3시 이전에 에스프레소 1샷이 포함된 커피로 정착했다. 그 이후에 카페인을 섭취하면 영락없다. 그 날은 뜬 눈으로 새벽 세 시까지 뒤척여야 한다. 칼 같은 노화의 시계는 저녁식사 후 수정과를 마시는 다소 예스러운 습관을 갖도록 몰아세웠다.



 십 년 넘게 알고 지낸 사람을 오랜만에 만났다. 긴 시간 붙어있어도 지루한 적 없는, 나랑 참 잘 맞는다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일상을 공유하고, 공감 받고, 가끔은 서로에게 아낌없는 조언을 해주는 사이였다. 


 그 날 그가 “사람 참 안 변해.”로 꺼낸 얘기의 대부분은 누군가의 험담이었다. 가까운 가족에서부터 일면식도 없는 인플루언서라는 사람까지 모두 도마에 올랐다. 개인의 약점을 보편성에 기대 ‘사람은 참 ~해.’ 라고 뭉개버리는 말 습관을 좋아하지 않아서 생긴 편견이었을까. 두 시간 정도 나눈 대화의 전부가 그가 생각하는 ‘변하지 않고 꾸준하게 신경을 거스르는 사람’에 대한 묘한 험담이다 보니 점점 기가 빨렸다. 귀로는 영양가 없는 얘기들을 들으면서 머릿속으로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해보려고 애썼다. 


 험담은 참 애매한 게, 일방적으로 듣기만 하면 왠지 형평성이 떨어지는 느낌이고 신나게 맞장구치자니 대상에게 그 정도의 악감정은 없어서 듣는 태도를 어떻게 해야 할 지 분명히 하기가 어렵다. 그날의 나도 그랬다. 고개만 작게 끄덕이거나 ‘아이고’ 정도의 작은 추임새만 넣을 뿐이었다. 객관적으로 듣기에 그다지 험담에 공감은 가지 않았고, 그게 티가 났던 모양인지 그도 말 머리나 끝마다 ‘욕을 하자는 건 아닌데~’, ‘물론 이해가 아주 안 되는 건 아냐.’ 등을 덧붙이며 자기가 남을 막무가내로 욕하는 건 아니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요즘 재밌게 보고 있는 유튜브 채널 얘기를 꺼냈다. 그냥 가벼운 얘기로 돌려보려고 한 건데 이런 반응이 돌아왔다.

 “어우. 난 요즘 유튜브 같은 거 너무 자극적이라 싫더라. 뭐가 다 너무 과해. 비속어도 너무 많고 진짜 해로운 느낌이야.”

 다시 난 입을 닫아버렸는데 속으로는 물음표가 한 가득이었다. 아니 저는 무방비로 남의 욕 듣고 있는 이 두 시간이 훨씬 더 해로웠는데요. 비속어가 들어가야만 욕은 아니잖아요. 헤어질 때쯤엔 말 그대로 에너지가 바닥나있었다.


 그리고 정말로 병이 났다. 그 해로운 두 시간이 몸에 병을 가져다 준 것이다. 체하고 몸살이 났다. 물만 마셔도 메슥거리는 지경에 약을 먹고 앓아 누워 곰곰이 생각했다. 그토록 잘 맞던 사람이었는데 뭐가 문제였을까.


 과거의 우리는 하루에 8시간 이상을 붙어있는 사이였고, 나누는 이야기의 6할이 험담, 4할이 평범한 얘기였다고 하면, 지금은 일 년에 몇 번밖에 못 만나는 사이가 되어 꼭 하고 싶었던 얘기만 응축하다보니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공유하지 못했던 남 험담만 남은 걸까. 4할의 평범한 대화 덕분에 남았던 좋은 기억이 싫은 부분까지 다 덮어두고 있었던 걸까. 


 엄밀히 따져보면 그는 쭉 그랬던 것 같다. 굉장히 편견이 없는 사람처럼 굴면서도 자신이 은연중에 세워둔 사람의 등급이나 범주가 있어, 인정하지 못하는 등급이나 범주의 사람은 가차 없이 공격했던 것이다. 늘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 대상이 아니라 생각해서 안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다른 누군가에게도 똑같은 방식으로 내 험담을 하고 있을지 모르는데. 


 그러니까 말하자면 ‘사람 참 안 변한다’는 그의 말처럼 그는 변하지 않은 게 맞다. 나는 변한 거고. 받아들일 수 있던 사람을 거북하게 느끼게 되었으니까. 


 그가 변하지 않고 새로운 누군가를 욕하는 동안, 나는 편안하고 달콤한 잠을 위해 좋아하던 커피를 줄이는 사람으로 변했다. 나이듦은 그런 거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진짜 이로운 게 뭔지 더듬더듬 찾아가는 것. 저녁 먹고 나서 고 카페인이 함유된 달달한 편의점 커피는 못 마셔도, 한낮의 에스프레소 한 잔 정도는 온 마음으로 누려보는 것. 나에게 진짜 이로운 건 잠들고자 하는 시간에 큰 뒤척임 없이 잠드는 것이니까.


 아마도 그를 멀리하는 수순을 밟게 될 것 같다. 언젠가 그에게도 평온한 밤이 찾아오면 좋겠다. 누가 싫고 누가 짜증나서 마음이 들볶이는 날보다, 늘 추구하는 것처럼 편견이 없이 누군가를 바라보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날이 많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사람은 언제든 맘먹은 대로 변할 수도 있다는 걸 스스로 가장 먼저 알았으면 좋겠다. 예전처럼 마주앉아 웃으며 대화하고 서로에게 따뜻한 잠을 선물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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