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래요셉의 뜰"은 내가 만들고 있는 생태텃밭 정원의 이름이다. 남편을 추억하는 정원이므로 남편의 이름과 천주교 세례명을 땄다. 성래요셉의 뜰 만들기를 시작하자 S님께서 백일홍 씨앗과 여러 야생화를 꽃밭에서 캐서 보내주셨다. 모종을 보내주신 날은 5월 2일. 꽃모종은 꽃이 있지 않은 상태였고 잎만 보고 무슨 꽃인 지 바로 알만큼 꽃들을 잘 알지 못했던 나는 꽃망울이 터지면서 꽃들이 하나하나 자신의 얼굴을 드러낼 때에야 피어난 꽃들을 알아차리곤 했다.
며칠 전부터 브로콜리 옆 틀밭에 심은 S님께서 보내주신 야생화 꽃망울이 맺히더니 아침 일곱 시 노란 꽃이 숨바꼭질하다 숨어 술래는 뭐 하고 있는지 쳐다보는 아이처럼 빼꼼하고 얼굴을 내밀었다. 오늘 활짝 필 것 같아 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여덟 시, 아침을 먹고 나와보니 꽃이 활짝! 노란빛 예쁜 달맞이꽃이다. O님과 J님이 H님, W 어린이와 함께 오셔서 주신 분홍 낮달맞이 꽃도 있는데 달맞이 꽃을 몰라보다니!
해, 달, 별, 꽃, 무지개. 남편이 있었던 J 병원 호스피스 완화의료 병동의 병실 이름은 숫자가 아닌 해, 달, 별, 꽃, 무지개였다. 남편은 2월 20일 응급실, 2월 21일부터 열흘간 1인실 격리, 그리고 호스피스 담당의 출장으로 인해 암병동 급성기 병실에 있다가 3월 6일 호스피스 병동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며칠 전 나 먼저 호스피스 교육담당 간호사 선생님을 만나 뵙고 병동을 미리 둘러보았었다. 그때는 병실 이름이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막상 호스피스 병동으로 들어와 병실 이름을 보니 왠지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해는 뜨고 지고, 달은 차고 기울고, 별은 반짝이다 사라지고, 꽃은 피고 지고, 무지개다리를 건너면 만날 수가 없잖아, 병실 이름이 하나같이 슬프고 슬프네' 속으로 생각을 했더랬다.
남편의 병실은 달. 4인실로 남편의 침상은 입구 쪽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남편은 하루 한번 정도 진통제가 매달린 폴대를 밀고 호스피스 병동 안을 한 바퀴 돌고 휴게실인 가족실에 앉아 잠깐 TV를 보기도 했다. 병동을 돌고 휴게실에 앉아 TV를 보는 시간은 길어야 10분 남짓.
" 여보, 병실 이름이 해, 달, 별, 꽃이야. 우리는 달실이잖아. 예쁘지 병실 이름! 야외 정원도 있대. 지금은 추워서 못 나가보지만 미리 말씀드리면 나가볼 수도 있대" 하면서 나는 늘 무지개실을 일부러 빼놓고 말하며 안쪽에 자리 잡은 무지개실로 남편이 가지 않도록 폴대 방향을 슬슬 바꾸곤 했다.
남편은 2015년 8월 K대병원에서 조직검사를 했고 2015년 9월부터 J병원으로 오기 전까지 N병원을 다녔다. 남편은 N병원 폐암 병동에 항암을 하느라, 조직검사를 하느라, 통증이 너무 심해서 여러 차례 입원을 했고 그때마다 우리는 누군가의 임종을 보곤 했다. 1인실인 N병원의 000실은 임종실이기도 했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해 보호자로 같이 병실을 지키는 가족들이 병실 문을 닫고 있어도,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른 척 해도, 누군가의 임종을 남편은 모르고 지나갈 수 없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남편은 물론이고 병실의 거의 모든 환자들이 앞으로 내게 남은 일이라며 표정으로 때로는 말로 절망감을 내비치곤 했다. 내가 아무리 남편이 무지개실 쪽으로 가지 않도록 발걸음을 돌려세운다 해도 남편이 무지개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저 우리끼리의 금기처럼 남편과 나는 무지개실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나 혼자 무지개실 앞을 지날 때면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자꾸 공무도하가 한 구절이 생각나곤 했다.
주말마다 아이들이 아빠를 보러 병원으로 왔다. J병원 호스피스 병동을 처음으로 왔을 때 올해 우리 나이로 열 살인 아들이 말했다. "엄마, 병실 이름이 다 예뻐요. 아빠 달실 그림이 초승달이에요"
그날, 음료수를 사달라는 막내 손을 잡고 편의점에 갔다가 병실로 돌아오면서 우리 병실을 표시한 달 그림을 천천히 다시 보았다. 초승달이 맞았다. 해도, 별도 꽃도, 그리고 무지개도 다시 보았다. 동그랗게 떠있는 해, 활짝 핀 꽃, 반짝이는 별. 아름다운 무지개. 호스피스 병실은 지는 인생이 아니라 여전히 아름다운 인생을 말하고 있는데, 나는 왜 사그라드는 생각만 하고 있었을까...
3월 28일. 나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남편이 임종 증상을 보이고 있다고 느꼈다. 어쩌면 주말에 남편이 우리 곁을 떠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시어머니께 전화를 걸어 제가 전화를 드리면 언제라도 오실 수 있게 준비를 해두시는 게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는 큰아이에게도 병원에 미리 내려와 엄마랑 아빠 곁에 함께 있자고 말하고 선생님께 양해를 구했다.
3월 29일 아침, 나는 간호사 선생님께 무지개실로 옮기고 싶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어 망설이고 있을 때 가장 친하게 지낸 같은 병실 어르신께서 무지개실로 옮겨졌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하늘로 갔다. 초승달이 그려진 달실에서. 그 몇 시간 뒤 어르신도 무지개실에서 하늘로 가셨다. 어르신의 딸인, 내게 늘 살가웠던 H가 말했다. "언니, 두 분이 외롭지 않게 함께 가셨어"
노란 달맞이꽃이 활짝 피어났을 때 나는 남편 생각을 가장 먼저 했다. 초승달이었는데 하늘에서 이제 보름달이 되었을까? 기다림, 말없는 사랑. 달맞이꽃의 꽃말처럼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나게 될 날이 있겠지. 이제 말로 전할 수 없는 사랑을 성래요셉의 뜰에 꽃들로 피워내야지. 달님이었던 그대에게 달맞이 꽃과 같은 내 마음으로. 내년에는 무리 지어 피어나겠지. 이토록 예쁜 달맞이꽃이!
6월 6일 아침 일곱 시, 어제까지만 해도 꽃봉오리였던 꽃이 살짝 얼굴을 드러내 주었다.
6월 6일 아침 여덟 시, 다시 나간 마당, 달맞이꽃이 활짝 피어났다. 이렇게 곱고 고운 꽃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