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진희 Aug 27. 2019

목화를 심었다

2009년 장수로 내려왔을 때부터 언젠가 목화를 꼭 심고 싶다고 생각해왔다.

"뭘 심고 싶어? 뭘 심을까?" 하고 남편이 묻길래 "목화를 심고 싶어"라고 대답했다.

지금 젊은 사람들이야 알지 못하겠지만 내 어릴 적에는 '목화밭 목화밭 목화밭 목화밭'이라는 목화밭이라는 단어가 끝없이 나오는 노래가 여기저기서 들리곤 했다. 잎이 어떤 지, 꽃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하얗고 무거운 목화솜 이불을 덮고 자라온 내게는 목화는 뭔가 따뜻한 것이었다. 언젠가 화분에서 자라 솜이 맺목화를 본 적이 있었다. 목화가 이렇게 예쁜 작물이었다니!


"그건 팔 수가 없겠어. 우리는 팔 수 있는 걸 심어야지"

유기농 소농의 삶을 선택한 우리에게, 땅도 없이 빌려서 농사짓는 우리에게, 마당 한 뙤기도 너무 소중한 우리에게, 화분에 심을 요령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농사를 몰랐던 나에게 목화는 그래서 심을 수 없는 작물이었다.


우리는 장수로 내려와서 제철 유기농 농사를 짓는 소농이 되었다. 농산물 회원분들을 모으고  여러 농작물을 조금씩 심어 그 주에 수확되는 농산물을 한 상자에 담아 꾸러미라는 이름으로 회원분들께 보냈다. 수입이 많지는 않았지만 꾸러미는 농부를 믿고, 농부가 생산한 농산물을 함께 먹음으로써 농부와 농사를 함께 짓는다는 공동체 정신을 기본으로 하고 있어 든든함이 말할 수 없이 컸다. 예쁜 꽃도 새로운 작물도 넣어드리고 싶은 건 많았지만 몇 년을 노력해도 해마다 실수를 하는 초보 농부 같아서 언감생심 목화를 심는 건  꿈같은 거였다.


마당(성래 요셉의 뜰)에 목화를 십여 주 심었다. 목화씨를 심고 싹이 안 올라오면 어쩌지 마음 졸이며 주를 기다렸다. 한잎 두잎 잎새를 보여준 목화는 여름 장맛비를 몇 차례 맞고서야 쑥쑥 자랐다. 한여름이 지나가는 길에 흰꽃 봉오리가 올라오고 하늘하늘한 흰꽃이 피어났다. 목화꽃은 신기하게도 이내 분홍빛으로 물들고 어느새 땅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꽃이 진 곳에 흰솜이 될 몽우리가 맺힌다.

하루 이틀 꽃을 보여주고는 이내 작별이다. 꽃만 예쁜게 아니라는 걸 알려주기라도 하듯이, 지고 난 뒤에 남는 것이 소중하다는 걸 알려주기라도 하듯이.


남편이 심지 못하겠다고 했었는데, 그걸 심을 한뙤기 땅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농사를 포기하고 나서 나는 목화를 심다. 뭐라고 설명하기 어렵게 마음이 아릿아릿하다. 남편이 하늘에서 보고 이제 목화를 심었네, 우리 마눌님 소원 이루었네 하고 있을까? 희고 흰 목화솜이 무리 지어 터져 나오면 가장 예쁜 것들을 골라 남편 사진 옆에 예쁘게 놓아두어야지.


그래도 그래도 목화꽃을 심지 못했어도 땅을 일구고 밭을 갈며 땀 흘리며  정직한 노동, 유기농 농사를 짓던 그가 나는 몹시도 그립고 보고 싶다.


목화는 흰 꽃으로 피어났다가  분홍으로 물들고 땅으로 금새 떨어진다. 그리고 그 자리에 흰솜이 될 몽우리가 맺힌다. 꽃은 빨리 지고 흰 솜이 되어 우리곁에 오래도록 머무른다.





 

이전 13화 내 정원의 시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