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필요한 말을 줄이는 것

그럼에도 사랑한다는 말은 참지 않기를

by 김뚜라미

요 며칠 내가 왜 전례 없이 마음이 평화롭고 근심이 없는지 궁금했다. 그냥 내가 스스로 행복하다고 되뇌어서 마음이 머리에 속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 봤다. 그렇지만 생각을 아무리 해보아도 약간의 미스터리가 남았다. 주말 육아를 함께하던 남편도 없고, 20일 넘게 머물고 있는 콘도도 비좁다. 무엇보다 하루 일과 중 딱히 즐거울 일 하나가 없는데 왜 나의 마음은 이토록 선명하게 맑은가. 항시 어깨에 가득 올려져 있던 긴장의 무게도 어느새 꽤나 가벼워졌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푸켓에 온 이후로 내가 누군가와 모국어로 긴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 물론 기본적인 생활어들은 간간히 내뱉고 지내지만 어떤 대상에 대해 긴 시간 대화를 하거나 의견을 나누는 일은 하지 않았다. 저녁 무렵 퇴근한 남편과 잠깐씩 하는 영상통화가 대화의 전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하고 싶은 말이 늘 흘러넘쳤던 내가 말을 하지 않아서 행복해졌다니. 아이러니하지만 나의 자아는 이 무(無) 언어의 상태를 안전하다고 느낀 것 같다. 늘 마음을 맴돌던 상실감이나 공허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요가로 시작하여 책 읽기와 규칙적인 식사, 그리고 와인 두어 잔과 함께하는 시시콜콜한 글쓰기. 그나마 지금의 삶에 자극적인 것을 찾자면 아직 끊고 있지 못하는 야식이다. 버터쿠키, 쥐포, 완두콩 튀김, 포스틱이나 새우깡처럼 바삭한 스낵류 등. 차마 호언을 할 수 없지만 말을 뱉는 시간이 줄어드니 야식도 끊어볼 수 있을 만큼 생활이 정돈되었다. 마음 구석 어딘가에 박혀서 나를 좀먹고 있는 공허감을 채우는 것이 아마도 저 야식들인 듯싶다. 끼니에는 전혀 집착하지 않으면서 어둑한 밤만 되면 감췄던 이빨을 드러내고 흡혈귀처럼 내 통제력을 앗아가는 야식과 알코올. 그 뒷면에 숨은 비겁한 나의 자아와 건강치 못한 마음들. 이것들이 말의 빈도와 상관관계에 있다는 게 약간은 궤변 같지만 나에겐 정말 그렇다.


내뱉은 횟수가 줄어드니 말로 인해 불거지던 실수도 줄고, 입 끝에서 나오는 가벼움으로 타인의 생각이나 행동을 평가하지 않는다. 언어 테두리 밖의 모든 사람들이 동등해졌고 무언가가 잘 안 풀렸을 때 그들의 탓으로 돌리는 비열함도 사라졌다. 여전히 메신저나 SNS로 타인과 소통하지만 나에게 문자는 마음을 정리할 시간을 준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나는 불필요한 수사나 격한 표현을 제거한다. 그래서 훨씬 정돈되고 젠틀한 방식으로 의견이 전달된다. 또 생각을 말로 내뱉지 않고 글로 작성하려고 노력하니 그 생각을 갖게 된 내 마음을 또렷하게 쳐다볼 수 있어서 편했다. 굳이 캐내어 탐구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상태. 말을 줄이니 희한하게 메신저로 문자를 보낼 때도 이모티콘이나 불필요한 ‘ㅋㅋㅋ ’이라든지 ‘ㅎㅎㅎ’의 사용이 줄었다. 대신 말 끝에 정확하게 온점을 찍게 된다.


어쩌다 보니 말을 줄이니 야식도 줄일 수 있을 것 같다는 무논리의 논리를 펼치게 되었지만 오늘 저녁부터 야식 끊기에 X번째로 도전해 보기로 한다. 맛도 잘 느끼지 못한 채 허겁지겁 씹어 넘기는 과자들에게 잠시 멈춰보라고. 마음 네가 나에게 풀고 싶은 서운함이 있으면 허심탄회하게 쏟아 내보라고. 나는 지금 내 속에 있는 말들을 거진 다 비워내어 건강한 마음을 채울 참이니 너도 좀 도와달라고.


이번 주말이 지나고 나면 언어 고립 상태가 십여 일 정도 남는다.

다시 가족이 합체가 되고 홍콩에 돌아가서 나의 작은 사회생활이 시작되면 어떻게 말을 지금처럼 잘 통제할 수 있을지 고민해 봐야겠다. 혼자만의 시간을 확보하는 것은 때론 쉽지만 일단 누군가를 만났을 때 언어여과기능이 지금처럼 잘 작동할지. 일단 부지런히 좋은 책을 많이 읽어서 내 머리와 몸을 바르고 청정한 언어들로 가득 채우는 수밖에. 차곡차곡 쌓인 좋은 언어들이 마음의 근육을 단단하게 해 줄 거라 믿는다. 부정적인 생각과 비난, 우울, 상실감, 나를 갉아먹는 모든 말들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자.


어제 새벽녘 딸아이가 소변을 보면서 갑자기 나에게 사랑해 엄마,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본인이 사랑한다는 말을 너무 많이 하지 않냐고 되물었다. 그래서 그 말은 하고 싶을 때 언제나 해도 된다고 해줬다. 자꾸 말해도 좋은 말이 있다는 걸 깜빡했네.


사랑해요.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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