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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번아웃 후 퇴사, 그리고 번아웃?

퇴사로 해결 안 되는 번아웃의 끈질긴 생명력

by 카리나

2015년 8월, 첫 퇴사를 했다.

사람 때문에 버틸 수 없어서 퇴사했다. 결혼 나이가 30대로 올라선 요즘 상황에서 감히 노처녀로 부르면 큰일 나는, 질투심과 일 욕심을 똘똘 뭉친 36살의 여자 과장의 괴롭힘 때문이었다.


"카리나 씨는 회사를 취미로 다녀?"라며 했던 말을 반복하는 이상한 버릇을 갖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 습관을 갖게 되었을지도.

나름대로 누구보다도 진지하고 일을 따라가기 위해 노력했던 것은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실수가 많은 갓 취직한 주니어를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생각하고, '라떼는..‘을 시전하며 필자를 조지기에 바빴다.


사실, 당시 역량이 부족했다. 속상했다. 그렇다고 해서 제분업계 고객사의 밀가루 제품 200개를 제공받은 뒤,

“카리나 씨, 반드시 혼자 정리해"라며 창고에 재고 정리를 굳이 하루에 2-3번씩 시킬 필요는 없었을 텐데.


악독한 그녀에게는 오직 회사와 직급밖에 없으니 그렇게라도 스트레스를 풀어야 했나 보다. 가끔 밀가루 200개를 땀 흘리며 더러운 창고에서 홀로 정리했던 그 당시의 나를 생각하면, 스스로에 대한 연민이나 미안함보다도, 약한 사람을 괴롭히며 평생 그렇게 살아갈 사람이 불쌍했다.


인성이 밑바닥인 상사를 첫 사회생활에서 만났던 그때, "이게 사회생활인가? Welcome to the hell?"이라고 생각하다가도, "사회엔 정말 열등감 덩어리, 질투심 많은 나이든 여자, 남에게 분풀이하는—질 낮은 사람들이 많구나. 와. 생각보다 내 주변에는 좋은 사람들로 가득했구나."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때 그 당시 노처녀 과장의 나이를 훌쩍 넘어 40살을 목전에 앞둔 싱글의 직장인으로서, 나도 혹시 그 사람처럼 화로 가득 차 타인이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 아닌지, 늘 감정 조절에 조심하려 한다.



첫 퇴사의 이유가 '사람'이었으니 괴롭히던 사람이 사라지면 별다른 스트레스가 없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약 일 년간 살았던 것이 번아웃까진 아니었지만, 기분이 영 썩 좋지는 않았던 것 같다.


퇴사 후, 전공했던 광고홍보가 나의 길이 아니라면 어떤 업을 직업으로 삼아야 할지 고민하며 회복의 시간을 4개월간 가졌다. 당시 너무나 되고 싶었지만 실패했던 승무원에도 계속해서 도전했었다.


승무원이 되는 것에 실패해서 수동적으로 홍보라는 직업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사실 정말 홍보를 좋아하고 잘 하고 싶었다. 그래서 부족한 점을 더 보충하고, 상대적으로 SEO부터 아주 작은 홍보 마케팅을 배울 수 있으며 호흡이 상대적으로 느린 헬스케어, 제약, 병원쪽에서 다시 홍보를 시작했다. 생각보다 많은(?) 구멍은 실컷 깨지며 보완했고, 성장을 위한 기회를 찾아다니며 퇴사했다.


6번 더 퇴사한 다음에서야 필자는 늘 똑같은 패턴, 비슷한 이유로 퇴사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도전→ 적응 → 스스로를 갈아 넣어 배우고 일하며 성장 → 번아웃 → 그리고 퇴사.


그렇다. 첫 퇴사를 제외한 6번의 퇴사, 모두 같은 사이클로 반복된 것을 알게 된 지금에서야 고백한다. 어쩌면 퇴사가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기보다는, 구멍 난 마음과 체력에 밴드(bandage) 역할 정도 한다는 것을.


번아웃의 본질은 성장통으로 인한 과로라고 생각했었다. 과로는 보통 신체적인 증상을 동반하니, 쉬면 신체는 생각보다 빠르게 회복한다. 그런데, 마음 상태는? 퇴사를 일으킨 이유로 인해 영향을 받은 정신적인 상태는 생각보다 더 시간이 흘러야 조금 정신을 차릴 수 있는 정도였다.


방향을 잃은 상태.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모르고 주저앉은 상태.


일과 개인의 정체성의 모호함. 그리고 내가 대체 뭘 하며 회사에 다니고 있는 건지. 이걸 계속하는 게 맞는지. 일하는 내가 진짜 내가 아닌건지 혹은 일치하는지. 왜 회사에서 이렇게 예민하게 변했는지. 그렇다면 회사의 옷을 벗은 나, '나다운 나'는 도대체 누구인지. 회사 옷과 나를 분리시킬 순 있는지. 일과 정체성의 모호함, 나다움의 부재와 그 혼란이 바로 번아웃의 본질이었다.



그리하여, 지난 2024년 10월, 인공지능 스타트업에서 버티고 버티다 결국 신체적 정신적 에너지를 모두 소진한 뒤, 11년 커리어에 '진짜 나를 돌봐야겠다'라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 매번 다 타버린 뒤 분명 회복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때 시도했던 회복은—짧은 여행을 통한 단순 스트레스 해소였을 뿐, 나를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되었다.


무려 11년이 걸려서야 내가 누군지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에, 7번째 퇴사는 단순히 여행을 통한 스트레스 해소가 아니라, 회복의 과정에서 철저하게 나 자신을 거울에 비춰보았다. 거울에 비친 나를 본 순간 참, 처량한 사람이 세상 다 산사람처럼 서있었다. 감정적으로 가장 조용하게, 멍하게 그냥 힘없이 바라본 나의 모습은 "도대체 왜 사는지 모르는, 그저 집-회사, 그리고 생존하기 위해 헬스장을 다니는 사람"이었다.


이제는 퇴사가 아닌 회복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제는 어떤 이유로 회사를 떠났다는 스토리가 아니라, 스스로를 발견하고, 나에게로 돌아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래서 연세대학교 심리과학 이노베이션대학원 사회심리학 석사과정에 진학하며, 나의 삶과 정신건강,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고자 공부하고 있다.


11년만에 알게된 번아웃의 실체.

그렇다. 번아웃은 회사에서 발생하고 회사를 떠나면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쉴 때도 번아웃이 온다. 작년에 쉴 때 번아웃으로 고생하며 알게되었다. 번아웃은 스스로부터 멀어졌을 때 찾아온다는 것을. 회사와 번아웃은 상관이 있지만, 상관없기도 하다.


지난 10월부터 5월까지, 나는 쉬었다. 멈췄다. 괴로웠다. 괜찮아졌다. 다시 더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다시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방향을 찾았다.

글을 썼다. 그리고 대학원에 진학해 마음과 감정, 생각과 행동에 대해 배우며 스스로를 돌아보고 있다.


바쁘게 지나온 시간 속에 놓쳐온 나를, 이제 천천히 되찾아는 지금, 삶을 새로 구성하는 이 길 위에서—나는, 어쩌면 결혼으로 시작되는 chapter 2가 아닌, 내 인생의 진정한 두번쨰 챕터 열었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고통스러워하고, 때로는 스스로를 어르고 달래며 힘겹게. 그리고 힘껏 인생의 다음 장을 열었다. 한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려면, 나의 마음부터 들여다봐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이 지금의 나에게 삶의 방향이 되어주고 있다.


이번 퇴사 에세이 <그녀는 왜 퇴사했을까>는 아래 문장들로 마무리 한다.


스스로를 찾아가는 이 길에서 만날, 저처럼 길을 잃은 마음들을 위해. 이제 진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다음 시리즈, '마음 이야기'에서 만나요.



글쓴이 카리나는..

11년 이상의 글로벌 PR 및 콘텐츠 마케팅 경력을 바탕으로, IT, 헬스케어, 유통산업 분야에서 리드 전환 성과를 창출해 왔습니다.
그동안의 커리어는 전문성 강화와 도전의 연속이었습니다. 이제는 그동안 쌓아온 콘텐츠 마케팅 노하우와 언론홍보 역량을 한 조직에 장기적으로 기여하여, 브랜드 론칭부터 지속까지 함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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