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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우면 지는 거라 했다.

이기려면 필요한 것인 줄은 몰랐다

by 이일일


저도 인플루언서가 되고 싶어요.



꿈 깨라는 말을 잘 쓰지 않았던 것 같은데 부러움이 가득한 꿈은 깨라고 보통 이야기 했던 것 같다.

우리가 자라면서 들어왔던 이야기도 나는 분명히 기억하는데 부러우면 지는 거라고 했다.

김경일 교수님의 이야기처럼 이게 도대체 어디서부터, 언제부터 시작된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고 어떤 순간에는 머릿속에 세게 자리 잡고 있을 수도 있다.

진짜 지기 싫어서 어떻게 하면 이 부러움을 없앨 수 있는지 심각하게 고민해 본 적도 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러움은 잘 없어지지 않는 것이었고 나를 참 괴롭게 만드는 것이었다.


어렸을 때는 왜 이렇게 잔스포츠 가방이나 나이키 운동화, 메이커의 하얀색 스니커즈가 그렇게 부러웠는지 모르겠다. 나이키 맥스 97 흰색 영롱한 것을 신고 다니는 친구들이나 포스를 신고 다니는 친구들을 보면 무엇에 홀린 듯 그 신발만 쳐다보게 되었던 그런 힘이 있던 것 같다.

그 힘도 부러움이라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면 그래야겠지만 그때는 그럼 내가 지는 줄 알고 4줄 달린 케이스위스 신발인가를 시장에서였나 싼 값에 주고 산 것을 애들이 모르는 엄청 유명한 브랜드의 신발이라며 속이고 속으로 위안을 삼았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 어리석고 부족한 거짓말에 속아준 친구들도 고맙지만 그걸 그렇게까지 속여서 내가 아주 비싸고 너네들은 모를 법한 브랜드를 신는 사람이라는 것을 각인시키고 싶어 했던 나도 그렇게 어리석었을 수 없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지만 그렇게 나는 나이키 신발 하나 신어보지 못한 채 학창 시절을 지나왔다.

(퓨마 정도는 신어봤던 것 같다.)


사실 그 부러움이 결핍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신발을 내 힘으로, 내가 번 돈으로 살 수 있게 되었을 때다.

병에 걸린 것처럼 하얀색 스니커즈를 끝도 없이 사서 차 트렁크에 채워 넣으면서 나의 결핍을 그렇게 충족하려고 했었던 것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그 결핍은 채워지는 느낌이 아니라 더 구매해야 하는 구매욕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보이는 대로 사면서 느낀 것은 결핍을 느꼈던 것을 채우기 위해 그것을 구매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구나 하는 거였다.

내가 그 결핍을 없앨 수 있던 것은 다른 데에 있었다.


썩 필요하지 않구나.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내가 부러워할 만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으면서 결핍은 없어졌다.

꼭 그걸 해보지 않아도 분명히 알 수 있었을 텐데 그때는 뭐가 그렇게 부러웠는지.

근데 사실 주변에서 그게 그렇게 부러울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 준 사람이 없었던 것 같다.

부러울 수 있고 그 부러움이 상당 부분에서 내가 성장하고 배울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야기해 준 사람이 없다.

그저 부러우면 지는 것이니 부러워하지 말라고 하는 이야기들 뿐이었던 것 같은데, 그건 부러움을 없애고자 최선을 다하게끔 만드는 일이었고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단지 어려서라기보다는 부러움이라는 것을 어떻게 없앨 수 있는지도 모르는데 없애려고만 했으니 되려 결핍을 불러오는 역효과가 났던 모양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부러움이라기보다는 비교였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 열등감이 생기니 결핍으로 표출이 되고 나이가 한참 들고 나서도 그렇게 신발을 사게 만들었지 않았을까 싶다.

결국 나이키 신발 하나 없는 나를 남보다 못한 사람으로 스스로 취급을 했으니 그렇게 신발을 안 사고 배기나.

그 신발을 무엇을 신는지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란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누가 가르쳐줬어도 잘 몰랐으려나, 그건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듣고 싶어 하지 않았거나. 그저 그 신발이 너무 예뻐서 사고 싶었던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어쨌든 그것은 비교로부터 나왔을 테니.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리석으면서 안타깝기까지 하다.

(신발만 이야기했지만 옷도 마찬가지고 가방, 전자기기 등등 다 마찬가지였다.)


김경일 교수님이 '부의 심리학' 책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부러움이라는 감정을 지나치게 억제하거나 숨기면 인간이 사회적 동물로서 느낄 수 있는 가치나 목표들에 눈을 뜨는 것 자체를 막는 일이 될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러면서 말씀 주시는 것이 '부러움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과정'인데 '자연스럽게'라는 표현이 참 인상적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표현 중에 생각나는 것은 '건강한 부러움'이다.

분명 건강한 부러움도 있지 않을까.

추구하는 가치에 더 한 걸음 다가설 수 있게 해 주고, 무엇인가를 건강하게 부러워할 수 있다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건강한 첫 출발점이 되어줄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런 부러움과 열등감을 헷갈리면 안 될 것 같다.

아마 비교와 판단을 동반하지 않는다면 조금은 건강한 부러움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데 사실 그런 조절이 잘 될 수 있는지는 사람에 따라 다르지 싶다.

정말 부러움에도 인내와 극복은 필요한 것 같다.

분명히 부러운 순간 자연스럽게 비교와 자기 자신에 대한 판단이 동반되기 십상일 텐데

그 순간 이 자연스러운 마음을 틀어막고 극복하여 건강한 부러움만 쏙 남겨야 하는 싸움이다.

그러면 아마 어떤 다른 노력이 동반되어야 하는지는 건강한 부러움으로부터 추출된 현명한 원동력이 만들어줄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가, 무엇인가가 부럽다는 이야기를 지금까지도 속으로만 외치고 자주 비교에 더해서 판단하고 자괴감으로 이어지거나 지는 싸움으로 이어졌던 것 같다. 체념이랄까.

그는 되고 어차피 나는 안될 것이기에 포기하는 것이랄까.

이제는 조금은 더 건강하게 부럽다 외치고 그럼 나는 내가 가진 무엇인가를 어떻게 활용해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고민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이제부터 우리는 건강하게,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아,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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