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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아침 Oct 04. 2024

다이어트와 모둠순대

- written by K

옛날 얘기로부터 시작해야 하겠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0년도 더 전의 일이다. 
 
 새로 시작하는 잡지의 막내기자를 구하느라 아내를 처음 만났다. 아내를 소개해준 또 다른 후배까지 대동하고 광화문의 김치찌개 식당으로 향했다. 그게 나의 면접이었다. 그때의 아내는 이제 사회에 막 나온 X세대였고, 집단 속에서의 조직이나 위계 따위를 크게 의식하지 않는 부류였다. 

샛노랗게 물들인 머리, 바닥을 쓸고 다니느라 밑단이 다 헤진 통 넓은 청바지, 그리고 오버핏 야상 차림. 그나마 짙은 화장이나 타투 같은 게 없어서 덜 무서워 보였다. MZ세대 이전에 X세대가 있었다!  
 
 사는 곳은 경기도고, 노는 곳은 주로 강남이라고 했다. 그때는 내가 아직 젊을 때였지만, 그녀는 나보다 한참 더 젊었고, 우리 둘 사이에는 심연보다 더 깊은 세대차이라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그 강을 딱히 건널 생각이 없었는데, 징검다리 같은 게 하나 보이긴 했다. 바로 먹는 것이었다. 그날 아내는 술도 밥도 잘 먹었다.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사무실에서 밥을 시켜먹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 책상은 책상이고, 밥상은 밥상이라야 한다. 그래서 광화문 일대의 순댓국, 부대찌개, 만두전골, 추어탕 같은 것들을 맛있게 먹었다. 먹은 만큼 일했다. 미식이라기에는 중구난방이었고, 식탐이라기에는 나름 까다롭게 식당을 골랐다.
 
 같이 일하는 후배들이 하나 둘 늘었다. 역시 아내와 같은 X세대들로 밥상 앞에서만큼은 단일대오를 형성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내가 그들에게 제공하는 복지는 거의 대부분이 밥상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일정한 식탐과 약간의 미식, 그 사이를 요란하게 오가며 술과 밥으로 살찌우는 시절이었다. 밥상이라는 징검다리라면 건널 수 없는 강 같은 건 존재하지 않다는 걸 깨우치는 나날이었다.
 
 그러니까 문제는 세대 따위가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끊임없이 시도되는, 좀비 같은 다이어트다. 그게 최고의 암초다.
 
 “안 먹어. 다이어트할 거야.”
 
 또 시작이다. 일 년에 몇 번씩 하는 그 선언. 시계태엽 같은 선언! 

그러면 나는 혼자서 24시간 콩나물국밥집으로 향한다. 꾸역꾸역 먹는다. 흑화된 <고독한 미식가> 주인공 버전, 그러니까 다크 이노가시라 고로쯤 되려나. 혼자 먹는 밥은 밥으로서의 의미를 상당히 상실한 무엇이다. 내일은 또 어쩌려나? 
 
 콩나물국밥 한 그릇 앞에 두고 말 그대로 퍼먹기만 하다가 끝날 내일의 저녁식사를 생각하면, 아무리 부지런히 숟가락질을 해대도 허기가 메워지지 않는다. 그래도 이 허망하고도 고독한 밥상을 견딜 수 있는 건, 아내의 선언이 그다지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길면 한 일주일 쯤 후, 나는 얼마든지 그녀를 무너뜨릴 수 있다. 


고기 먹으러 갈래? 닭발 사줄까? 그런 건 탄수화물도 아니잖아! 먹으면서 해!


그런데 정말 인생이 쉽지 않다. 아내라는 산을 넘었더니, 이번에는 강을 건너야 한다. 


우리 부부의 밥 친구인 후배 S. 
 
 “아니, 괜찮아요. 이제 운동하러 갈 거예요.”
 
 아내도 S도 못 먹는 게 없이 다 잘 먹는다. 둘 다 맛집을 탐색하는 데 열정적이고, 탐색에서만 끝나지 않고 꼭 가서 먹어보는 실행력까지 닮았다. 소개한 맛집이 좋은 평가를 얻으면 그걸 엄청 뿌듯해 한다. 게다가 요즘은 아내의 맛집 정보보다 회사 생활을 하는 S의 정보가 더욱 쓸 만하다. 그런데 S는 아내보다 더 자주 다이어트에 돌입한다. 제일 최악의 상황은 아내와 S의 다이어트가 겹칠 때다. 바로 그때 나는 지구 종말의 기분을 맛본다.
 
 오늘 뭐 먹지? 어디어디에 가면 뭐가 맛있다던데! 얼마 전에 요 앞에 새로 식당이 생겼어. 가볼까? 우리 맨날 지나다니던 근처에 엄청 유명한 노포가 있던데, 휴무일에 거기 갈까요? 이런 대화가 사라진 시간들, 그래서 다이어트를 하지 않는 나마저도, 하루 삼시세끼 꼬박 챙겨먹는 나마저도 허기에 시달리게 만드는 시간들. 그래도 괜찮다. 이겨낼 수 있다. 이 선언 또한 오래가지 않는다. 한 열흘 후쯤이면, 나는 얼마든지 S를 밥상 앞에 앉힐 수 있다. 곱창 먹자!
 

하지만 고난은 끝이 없다. 


 “아니, 안 먹을래!”
 

우리 집 따님에게서 나오는 앙칼진 목소리. 아들 녀석은 까다로운 식성 때문에 언제나 밥과의 전쟁을 벌였지만, 딸은 달랐다. 볼에 음식을 한가득 넣고 오물거리는 모습이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쭉 귀여웠다. 중독성이 매우 강한 귀여움이었다. 나는 딸아이를 먹이고 또 먹였다. 아내는 종종 딸아이 입에 들어가는 음식을 재빠르게 빼앗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혼잣말을 삼켰다. 


독해, 너무 독해. 애가 저렇게 잘 먹는데! 뭘 그렇게 잔인하게! 


그런데 십대 후반이 되면서 딸아이는 종종 음식을 앞에 두고 입을 꾹 다무는 날들이 생겨났다.
 
 딸아이의 전쟁은 처절했다. 살도 빼고 싶고, 맛있는 건 너무 많고, 식욕은 조절되지 않고, 앉아서 공부만하는 세상에서 유일한 낙이라곤 맛있는 음식을 먹는 일이고…. 딸아이의 다이어트 선언은 사흘에 한 번씩 갱신된다. 다이어트 결심이 무너질 때마다 딸아이는 수험생 생활만 끝나면 화끈하게 살을 빼겠다고 다짐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식구들 중 가장 섬세한 미식가의 기질을 갖고 있어서 더 그렇다.
 
 아내는 나의 ‘삼식이 라이프’에 진절머리를 치지만, 나는 그럼에도 꺾이지 않는 밥상 예찬론자다. 밥상, 그것은 꼬뮨commune이다. 우리의 의지로 건설하고, 유지하고, 지속시킬 수 있는 가장 일상적이고 강력한 꼬뮨. “인간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라는 예수Jesus의 말에 나는 50%만 동의한다.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준다면,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할 수 있다”는 브리야 사바랭Brillat-Savarin의 말 역시 그렇다. 함께 먹을 수 있다면 인간은 충분히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며, 함께 먹는 사람들이 곧 또 다른 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랑하는 나의 사람들아, 먹자! 한 끼를 위한 노동의 고단함이야 누군들 어쩔 수 없을지언정, 함께 앉은 밥상의 즐거움이야말로 마땅히 우리들 행복의 몫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결코 쌀과 나물과 고기들보다 오래 살 수 없다! 아, 다이어트의 어리석음이여!
 
 에필로그
 
 그러나 우리 집에서도 다이어트에 성공한 유일한 생명체가 있다. 바로 우리 집 리트리버 ‘조금’이다. 녀석은 지난 해 갑상선 호르몬 이상으로 ‘살크업’이 엄청나게 되는 바람에 약물 치료와 철저한 다이어트를 병행해야 했다. 조금이를 살찌운 장본인은 나다. 나의 세상에서 내가 권하는 나의 간식을 누구보다 맹렬히 욕망하는, 그래서 언제나 나의 꼬뮨을 행복하고 소란스럽게 만드는 조금이. 그런데 일체 그것을 금지해야 했다. 아내는 사료의 적정량을 눈금으로 그어서 표시했고, 시시때때로 주던 간식도 철저하게 제한했다.
 
 조금이는 허기에 시달렸고 나는 먹이를 조금씩 더 주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느라 몸이 달았다. 아내는 흐뭇해했다. 자신의 다이어트 욕망을 조금이에게 투사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아내는 딸의 다이어트에 잔인하고, 개의 다이어트에 비겁하다. 그 탓인지, 그 덕분인지 결국 조금이는 10킬로그램이나 빠졌다. 아내는 그 사이에 조금 더 살이 쪘다. 아내는 말한다. 

“내일부터 다이어트 할 거야.”

내가 화답한다.  

“그래, 그러자. 그럼 내일은 모둠순대 먹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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