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게으른아침 Oct 04. 2024

내 남편의 수의

- written by C

남편은 죽음의 처리에 관해 고루한 생각을 가진 남자였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화장장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외할머니도, 아버지도 벽제에서 화장하고 산에 뿌렸다. 남편은 매장 외에는 다른 방식의 장례를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남자였다. 화장은 결단코 싫다고 했다. 이유를 물었다. “뜨겁잖아.” 이게 10년 전쯤의 일이다.
 
 그 사이 가족들의 죽음이 두 번 있었다. 시대적 흐름을 받아들여 모두 화장을 했다. 남편도 대세에 떠밀려 화장장을 받아들였다. 화장 후에는 가족묘지에 안장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가족들의 미래 묫자리도 예비되어 있었다. 장례를 치를 때마다 남편에게 말했다. “나는 가루가 되어 이곳에 묻히고 싶지 않아.” 그가 이유를 물었다. “답답하잖아.” 5년 전쯤의 일이었다.
 
 남편은 고집이 센 남자다. 최근에 어느 점성술과 사주명리를 보는 이가 남편에 대해서 말하길, “이런 정도의 고집을 가진 사람이라면 군대에서는 영창감”이라고 한 적이 있다. 함께 있던 모든 친구들이 박장대소했다. “대체 어떻게 안 거지?!” 다들 철창 안에 처박힌 그를 상상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남편은 그런 남자지만, 일단 자기 고집을 꺾고 선을 넘으면 뒤를 돌아보지 않는 부류이기도 했다. 등 떠밀리듯 매장파에서 화장파가 된 남편은 숙고의 시간을 가지는 듯하더니, 어느 날부터는 화장파의 맨 앞줄에 서서 맹렬히 달리기 시작했다. 장례 절차에 대해서도 과감해졌다. 자기 장례식에서는조문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른바 무빈소 장례식인 거다. 빈소가 없으니 조문객도 없고, 입관 후 화장터로 직행하겠다는 그의 선언! 와우, 이런 속전속결이라니. 그는 당장이라도 화장터로 달려갈 기세였다. 그는 요즘 화장터가 얼마나 붐비는지 알지 못했다. 번호표를 대기해야 한다고 알려주고 그를 진정시켰다. 


 “그래? 할 수 없지. 시체냉장고에 며칠 들어가 있는 수밖에.”
 
 “춥겠네.”
 
 조문객을 받지 않는 장례는 오랫동안 내가 생각해온 바이기도 하다. 나는 죽으면 다 끝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죽으면 더 이상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다는 사실은 슬프지만, 그런 슬픔도 살아있는 동안에나 유효한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모든 장례 절차를 다 마친 뒤 집에 돌아온 다음에야 실컷 울었다. 내 방에 홀로 앉아 아버지가 내내 사용했던 손수건을 움켜쥐고서 말이다. 나는 그 울음으로 장례를 마쳤다. 
 
 남편과 나는 다음과 같이 합의했다. 죽기 전에 의식이 있다면 친구들이랑 밥을 먹자. 케이크에 촛불도 켜자. 한 사람씩 웃으면서 안아주자. 특별할 것 없는 안부를 묻고 웃으면서 인사하자. “나중에 봐.” 우리의 바람은, 그때쯤 우리 사회도 존엄사를 선택지로 인정해 주었으면 하는 거였다. 그런 얘기를 나누고 나니 남편과 내가 제법 유쾌하고 평화롭게 죽음의 문제를 공유할 수 있게 되었구나 싶었다.
 
 정말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악마는 디테일에 도사리고 있으며 남편은 그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거는 남자였다. 내가 그걸 왜 깜빡했을까.
 
 최근 늦은 밤에 후배들과 영화 <파묘>를 보고 죽음에 대해 얘기를 나누다가 우리의 ‘진짜 마지막인 최종의 파이널 부부 해방 전선’이 활활 타올랐다. 죽고 난 뒤 수의로 어떤 옷을 입을 것인가 하는 거였다. 어이없게 들릴 테지만 수의 전쟁은 새벽 한 시까지 이어졌다. 이야기는 일단 후배들에게 우리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고지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논쟁의 불씨는 남편이 먼저 댕겼다.
 
 “나는 마지막에 축구할 때 입던 운동복 입혀줘. 알았지?”
 
 “무슨 소리야. 그냥 (삼베) 수의 입고 가는 거지.”
 
 “싫어. 내가 평소에 좋아하던 옷 입고 갈 거야.”
 
 “빈소도 조문객도 없이 간소한 장례식을 하기로 한 거잖아. 거기다 대고 이 옷 저 옷 입겠다, 요구하는 게 말이 돼?”
 
 상상해 봤다. 장례 절차를 진행하는 장례지도사에게 “잠깐! 축구복을 입혀야 해요!”라고 말하는 장면……. 지금도 그는 매우 말랐는데, 죽고 나면 더 왜소해지겠지? 그런 그가 몸에 착 달라붙는 상의와 반바지, 그리고 빨간 축구양말을 신은 장면……. 그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전하려다가 눈물이 쏙 들어갔다. 보기에 썩 좋지 아니하였다. 
 
 “안 돼. 그냥 수의 입어.”
 
 “왜? 내 장례식인데!”
 
 “죽은 사람은 상관없지만, 나는 살아서 그 우스꽝스러운 걸 견뎌야 하잖아! 장례식은 산 사람이 치루는 거야.”
 
 “당신은 초록색 좋아하니까, 위아래 초록으로 깔 맞춰서 입혀 줄게. 당신 늘 끼고 다니는 이어폰도 꽂아줄까?”
 
 또 생각해 봤다. 이어폰을 꽂고, 온통 초록색으로 맞춰 입은 채 누워 있는 내 모습을 말이다. 아, 아무래도 안 되겠다. 관속에서도 이어폰을 통해, “배달의 민족, 주문!”, “쿠팡이츠 주문입니다!” 하는 알람을 들어야 하다니. 진짜 안 된다! 하다못해, 이 순간마저 저 남자는 자기 관속에는 취미를 넣어가려 하고, 내 관속에는 노동을 넣어주겠다 한다.
 
 며칠 동안 이어진 ‘부부 해방 전선’의 공방을 곁에서 지켜본 후배 S가 말했다.
 
 “언니! 그래도 이번 판은 언니가 유리해요. 아무래도 훨씬 나이 많은 형부가 먼저…….”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남편과 나 사이의 전선은 뜨겁다. 나는 변함없이 강경한 수의파다. 삶에서 죽음을 분리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확실한 게 있다. 장례식은, 이미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는 더욱 더 자본주의적 생애주기 이벤트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남은 가족들이 상조회사의간편화된 프로세스에 따르면서도 가장 단순화 된 장례 절차를 밟기를 바란다. 남은 사람들이 장례 절차 때문에 진을 빼지 않도록 말이다. 남편은 여전히 고집스럽게 수의자율화를 주장한다. 죽는 순간에도 철저한 조기축구맨이기를 바란다.
 
 남편은 조기축구회에서 맞춘 유니폼을 갖고 있다. 빨간색이다. 그 와중에도 자기의 취향을 새기고 싶어서 유니폼 뒷면에 그림을 그려 넣었다. 볼을 차는 자기 캐리커쳐를 말이다. 정말 유난인 남자다. 이걸 수의로 하겠다면, 그림이 보이게 덮어줘야 하나, 그냥 입혀야 하나. 아니야. 그런 생각하지 마. 심지어 유니폼 소재를 태우는 건 괜한 탄소 배출만 늘리는 일이잖아?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 한 그는 결국 삼베로 짠 수의를 입게 될 거야. 

이전 26화 아내가 죽음을 가르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