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ritten by K
아내는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며 친해지기까지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린다. 친교를 위해서 누군가 듣기 좋은 말을 그냥 해주는 법도 별로 없다. 그렇지만 내가 아는 바, 아내는 의외로(?) 말이 많은 편이다. 누군가 1을 말하면 그 1에 2, 3을 보탠다. 그래서 친구들과 대화할 때 늘 적극적이고, 주도적이다. 만약 아내가 누군가의 말에 추임새만 넣고 있다면, 필경 마주하고 있는 상대방과의 대화가 불편하다는 신호임이 분명하다.
아내의 다변은 아침 식사에서 빈번하게 확인된다. 우리의 아침 식사는 다섯 식구가 오붓이 모여앉는 경우는 드물다. 넷 혹은 셋이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셋일 경우는 아내와 장모님 그리고 나다. 식사 자리에서 아내가 어머니의 말에 단답형으로 끝내는 일은 결코 없다. 꼬박꼬박 대꾸하며 기어이 화를 돋운다. 장모님의 푸념은 늘 같다. “아니, 언제부터 이렇게 말이 많아졌지. 어렸을 때는 사람들이 말이 너무 없다고 걱정할 정도였는데!”
아내의 다변이 빛을 발하는 순간은 단연코 친구들과의 대화에서다. 친구들이 주문한 메뉴를 만들고 나면, 자신의 커피를 챙겨서 당장 주방 설거지는 내게 맡겨두고 쌩하니 친구들과 합석한다. 이내 ‘수다 콘서트’가 시작된다. 정치에서 예능까지 경계를 넘나드는 따끈따끈한 이야기의 스펙터클.
새로운 드라마에 관해서 말할 때면 더욱 어마어마해진다. 그녀는 핫한 드라마를 놓치지 않는다. 특정한 장면의 분위기와 대사를 모조리 기억한다. 한번은 제대로 보고, 두 번째부터는 그냥 틀어놓고 듣는다. 흔히 말하는 ‘드덕’들이 캐릭터 분석을 하는 것 외에, 작가와 감독의 이력과 스타일 등을 다 꿰고 있다.
<나의 아저씨>나 <나의 해방일지>를 쓴 박해영 작가에 대해서는 툭 치면 줄줄줄 뭐든 할 얘기가 나온다. 내가 기억하는 한, 아내는 20년 전 ‘미드’가 한창 유행일 때도 그랬다. 우리나라에 미처 풀리기 전에, 먼저 다운받아서 보고 번역판이 풀리면 그걸 또 봤다. 새로운 시즌의 캐스팅이 어쩌고저쩌고. 이렇게 아내는 새로운 유형의 아줌마가 된 것일까? 그런데 나는 늘 아내-아줌마가 수상했다.
아내의 다변은 풀가동되는 핸드폰과 컴퓨터 때문에 가능하다. 나는 주로 포털사이트 뉴스를 보지만, 그녀는 자신이 관심을 가지는 분야의 커뮤니티로 돌진하거나, 유튜브를 이용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어플도 꽤 많이 깔아놓고 있다. 이슈가 되는 뉴스를 그때그때 편집해서 소개해주는 특정 프로그램들 또한 꾸준히 소비하는 모양이다.
내가 기껏 축구(화) 리뷰나 들여다 볼 때, 아내는 디지털 왕국의 필드를 넓게 뛰어다닌다. 그러지 않고서는 아내의 다변은 설명될 수 없을 것이다. 아내는 나 같은 디지털 문맹과는 아주 다른 신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이다. 아, 피곤하지도 않나! 세상을 얼마쯤 살다보니 이 세상에 대해 궁금한 것도 놀랄만한 것도 이제는 거의 없는데. 세상도 그리고 나 자신도 이제 더 이상 신선하지 않은데. 어떻게 마치 갓 잡아 올린 생선처럼, 푸릇푸릇한 나뭇잎처럼 세상만사에 이토록 진동할 수 있을까.
그녀를 진동시키는 결정적인 것 한 가지. 이어폰! 손에는 핸드폰, 귀에는 이어폰! 나와 아내가 그저 선배와 후배이던 시절, 호랑이 담배 피던 그때의 한 에피소드가 아직도 나는 생생하다. 지금 MZ 세대의 라이프스타일이 여러 차원에서 화제가 되고 있지만 X세대인 아내가 한 발 더 빨랐다. 20년도 더 된 일이다. 그녀는 나와 함께 지하철을 타고서도 이어폰을 끼곤 했다.
나는 그게 영 꼴 사나워 보였다. 아니, 어떻게 사람을 옆에 둔 채 단절을 선언하기라도 하듯 이어폰을 꽂고 다른 세계로 빠져들 수 있을까. 꼰대처럼 한마디 했다. 아내의 항변은 좀 어처구니없었다. 한 쪽만 끼고 있었다고. 음악 없이 그냥 귀에 꽂아만 둘 때도 많다고. 그 이후로 나는 그 누구에게도 이어폰을 빼라고 말해 본 적이 없다. 아내 역시 그걸 뺀 적이 없다.
지금도 아내의 귀에는 블루투스 이어폰의 한 쪽이 꽂혀 있다. 뭘 듣고 있는 건 아니고, 그냥 늘 무언가를 들을 준비가 돼 있다. 또 이제 그걸 뺄 수 없는 절대적인 명분도 있다. 우리 매장에는 전화가 없다. 예약 전화나 포장 주문 전화 같은 건 모두 아내에게로 걸려 온다. 그러니 나로서는 할말이 없다. 빌어먹을! 짐작컨대, 아내는 이어폰을 잃어버리면 신체기관을 상실한 기분을 느낄 거다. 나는 그걸 빼라고는 하지 않지만, 그걸 없애버리고 싶다는 격렬한 충동을 오늘도 참고 있다.
아내는 <사이보그여도 괜찮아>라는 책에 대해 쓰면서, 언젠가 사이보그가 되어도 괜찮다고 한 적이 있다. 아니다. 그녀는 이미 사이보그다. 내가 이빨이 성치 않아 임플란트 시술을 받는 것처럼, 그녀는 자신의 귀에 이어폰을 이식한 지 오래다. 내가 생존형 사이보그라면, 그녀는 자발적 망명으로서의 사이보그다. 그녀는 아무런 이질감 없이 일찌감치 사이보그로서 살아가고 있다.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가 했던 말이던가. “지금 이곳이 아니라면 그 어딘들 무슨 상관이랴!” 나는 바로 옆에 아내가 있어도 그녀가 어느 세계의 길목을 어슬렁거리는지 알 수 없다. 내 아내는 수상쩍은 디지털 망명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