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ritten by K
2월의 어느 날, 아내에게 부고가 전해졌다. ‘피스 언니’가 죽었다. 그녀의 SNS 아이디가 ‘피스 인 제주’였다. 남편의 은퇴 후 제주에서 완전한 평화를 누리며 살던 그녀는 갑작스럽게 아프기 시작했고, 지난 몇 년 동안의 힘겨운 투병을 해왔다. 코로나가 극심한 시기에도 병원에 다니느라 서울과 제주를 오고가는 생활을 했고, 어려운 수술을 마친 후 회복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점치는 중에 었다. 그런 그녀가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우리 집 여름 능소화를 좋아했다. 가을 금목서를 좋아했다. 그녀는 내 아내의 어리바리한 순진함을 좋아했다. 밝은 농담과 감각어린 취향을 좋아했다. 그리고 내가 만드는 크림치즈 파운드케이크와 에그 타르트를, 또 마르게리따 피자를 좋아했다. 아내와 피스 언니는 많이 다른 사람이었지만, 한 가지 통하는 것이 있었다. 죽음의 처리가 그랬다.
십 수 년 전쯤의 이야기부터 해볼까 한다. 부모님의 제삿날, 나는 언제나 그랬듯 몸과 마음이 분주했다. 아침부터 마당을 쓸고, 현관도 정리하고, 집안 대청소도 했다. 시간은 후딱 갔다. 제사상과 병풍, 제복을 꺼내놓고, 제기들도 하나씩 닦았다. 주방에서는 온갖 기름진 음식 냄새가 퍼져 나왔다. 나의 누나들, 나의 아내가 한데 모여 전도 부치고, 소라도 삶고, 산적도 구웠다. 소쿠리에 담아 놓은 동그랑땡 하나를 집어 먹는다. 상에 올리기 전에 함부로 손대는 것 아니라고 큰누나가 타박을 하자, 작은누나가 편을 들어줬다. “막내아들이 제사상 차리는데, 아버지 어머니도 기특해 허주게.” 나이도 먹을 만치 먹은 나이였지만, 왠지 제삿날이면 부모님이 투명인간처럼 집안 어딘가에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장인어른의 제삿날, 처가에서 나는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된다. 얼굴 한 번 뵌 적 없는 처지라 그렇기도 하지만, 제사 풍경이 워낙 생소해서다. 제사상은 있되, 병풍 없고, 제기 없고, 지방 없고, 제복은 있을 턱이 없고…. 집에서 쓰던 것들 중, 장모님이 가장 아끼던 그릇들을 따로 모아서 차려낸 제사상 위에는 음식 또한 단출했다. 죽은 이를 기리기보다는 산 자들의 저녁상 정도라고나 할까. 경상도 출신 직업 군인이었던 장인의 뜻이 그랬단다. 우리 집안에서 차리는 상의 1/3 이하 규모다. 아내의 돌아가신 조상들은 모두 묘지를 쓰지 않았다. 자신도 나중에 화장하겠노라 했다. 제사도 필요 없고, 납골당도 거부한다고 했다. 엥? 우리 집안은 가족 공동묘지가 있는데? 며느리들 자리도 다 있는데? 왜 나랑 안 묻히고?
아내가 가진 죽음에 대한 생각은 나를 당혹케 했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충격적이었다. 아무리 그녀와 나 사이의 10년이 넘는 물리적인 나이차가 있다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어떻게 저런 생각이 가능할까 싶었다. 죽음 이후에 대한 발언은 아내를 조금은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나와 다른 사람이었다. 같은 신을 믿었지만, 다른 영혼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당신 살아생전에 가족 묘지를 조성했다. 당신의 부인과 자식들 그리고 그 자식들의 자식들까지 함께 할 사후의 공간을 있는 힘껏 일궜다. 종종 어린 나를 데리고 가서는 돌을 줍게 했고, 풀이나 흙들을 나르게도 했다. 보잘 것 없는 나의 노동이 당신에게는 어떻게 보였을까? 묘지가 될 척박한 땅과 어린 막내아들의 서툰 노동을 보는 당신의 흐뭇하면서도 애틋한 미소가 문득 기억나곤 한다. 당신이 일군 그 공간에 당신이 가장 먼저 몸을 뉘었다. 나 역시 언젠가 그곳에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적어도 아내의 그 발언 이전까지는.
세월이 흘러 우리 집안에도 여차저차 사연들이 생겼다. 그러는 동안 형제들은 가족 묘지를 돌보지 않게 되었다. 벌초는 내 몫이었다가 육지에 있는 형이 맡았는데, 그 역시 별다른 성의를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는 그저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연대기 속에 있을 뿐이다. 무덤이라는 현실의 공간은 상징으로도 그 의미를 거의 잃어버린 셈이 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아내가 옳은 것일까? 현실을 애써 붙잡지도 않고 상징에 의지하지도 않는, 죽음에 대한 그 어떤 태도. 나는 어쩌면 아내로부터 지금 죽음에 대해 배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피스 언니’가 세상을 떠나던 그 날, 봄이 왔음을 알리는 비인지, 아니면 겨울의 마지막 안간힘인지 그 경계가 애매한 비가 내렸다. 겨울이면서 봄이었고, 봄이면서 겨울이었다. 그렇게 삶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삶이 있다. 그녀는 임종을 앞두고 남편과 가족에게 몇 가지 당부를 남겼다.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 것, 장례는 철저히 간단하고 간소하게 할 것. 나중에 내 아내가 할 유언 역시 그녀의 유언과 같지 않을까?
되풀이해서 말해보면, 나는 그와 같은 죽음의 처리를 앞에 두고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함께 했던 세상과 더불어 살았던 이들에 대한 차가운 작별 형식이랄까, 그것이 못내 야속한 것이다. 물론 이제 조금은 안다. 어쩔 수 없는 것들은 어쩔 수 없는 거다. 죽음에 너무 많은 느낌표를 달지 않아도 좋다. 또한 삶이라는 그릇에 너무 많은 것을 넣지 말라는 경고를 나는 받아들이는 중이다. 우리 모두, Rest in Pe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