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ritten by C
특정한 세대, 특정한 성별을 향한 어떤 규정들은 상당히 맞고, 동시에 상당히 틀린다.
이를 테면, 나는 한동안 특정한 시간에 카페에서 수다 떠는 일을 즐겼다. 11시부터 오후 3시까지.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 아이들을 키우는 친구들을 만나기 가장 편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대화 주제는 대부분 아이와의 관계, 남편과의 관계, 그리고 다른 친구들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카페에서 이런 대화를 왁자하게 나누는 ‘아줌마’들을 향한 사회적 시선이 어떤지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런가 하면 나는 그렇지 않은 자리에서는 과묵하고 차분한 성격의 소유자로 오해/이해 받기도 한다. 서비스업을 생업으로 삼고 있는 처지에, 모두에게 친절하지도 않고, 모두에게 무뚝뚝하지도 않다. 내가 특별히 이랬다저랬다 하는 사람이라서 그럴 수도 있지만,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랬다저랬다 하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남편의 경우도 비슷할 거다. 그는 정치적으로 진보한 사람이지만, 어떤 자리에서는 철지난 신념을 붙들고 사는 ‘한남 아재’인 동시에, 스무 살 이상 어린 후배들이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 어떻든 상관하지 않는 편이고 그저 웃기기만 하면 만사 오케이인인 사람이다. 어떤 순간에는 맨스 플레인을 시전할 때도 있지만, 나이든 남자의 중요한 덕목이 침묵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잘 실행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책을 읽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자신이 읽은 책으로 편견의 성을 평생 편견의 성을 쌓아올렸음을 인정한다.
우리는 언제나 그때는 맞고/틀리고, 지금은 틀리고/ 맞는다. 그런 순간에 자기의 프레임을 조금씩 흔들고 깨트려가며 세상과 사람을 조금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목소리가 크고 굵고 종종 발음이 뭉개지고 옛날 얘기하기를 즐기는, 정년퇴임 이후의 남자에 대해서 나는 편견이 있다.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보수적이기 쉽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곧잘 그런 사람들의 삶의 디테일은 그냥 지나친다. 꼰대의 좌장쯤으로 분류해 놓고 만다. 지금 이 문장들은 이제 이어질 반성문의 밑밥이다.
노년의 두 남자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중 한 남자가 이 동네에서 최소 35년 이상을 살았다며 자신을 소개했다. 스스로 동네 터줏대감이라고도 했다. 터줏대감의 동행인은 자신을 퇴직한 교장선생님이라고 했다. 퇴직했음에도 여전히 대한민국의 교육 발전을 위해서 애쓰는 중이라고 자랑스러워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비즈니스용 웃음을 짓는다. 한없이 어색하고 불편한 웃음이다. 상당히 경직된 태도에 불편한 어투를 감추지 못한다.
퇴직한 교장선생님은 가방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 내게 내밀었다. 어떤 교육 잡지에 실린 자기 원고라고 했다. 들어본 적이 있는 매우 보수적인 잡지였다. 사실 여기까지는 이해하려면 이해할 수 있었다. 나도 내가 쓴 걸 누군가에게 보라고 SNS에 올려놓고 타인의 반응에 매우 신경을 쓰는 사람이니까 비슷한 거라고 넘어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 다음의 요구는 불쾌했다. 가게에 다른 손님이 없으니 그걸 소리 내서 읽어 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나가달라는 멘트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열심히 궁리했다. 그렇지만 내 입에서 나온 말은 고작해야 이거였다.
네, 나중에 읽어볼게요.
그렇게 말하고 나는 그가 건넨 원고를 밀쳐두었다. 끝내 읽지 않는 것으로 거절의 의사를 표했다. 퇴직한 교장선생님은 세 번까지 권하지는 않았다. 가게는 작았고, 그들의 목소리는 너무 컸고, 손님은 없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나의 귓가를 쟁쟁쟁 울렸다.
그들 사이의 대화에는 내가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정치적 견해와 사회적 해법들이 오고갔고, 타인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화가 날만큼 권위적인 태도를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그들의 대화는 30분 이상 이어졌다. 이상한 게 하나 있었다. 터줏대감 손님이 커피를 전혀 마시지 않는 거였다. 크고 두툼한 손으로 잔을 감싸 쥐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나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이렇게 말했다.
“라떼에 하트가 너무 예뻐서 이걸 못 먹겠어.”
나는 시답잖은 농담이라고 여겼고,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그가 다시 큰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너무 예뻐서 마누라 가져다주고 싶네.”
나는 그제서야 답했다.
“오늘은 그냥 맛있게 드시고, 다음번에 같이 오세요.”
내 말에 두 사람이 마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하하. 그러면 좋겠지만, 우리 마누라는 허리가 아파서 움직이지 못해.”
남자는 커피 한 모금을 아주 조심스럽게 마신 뒤, 나를 향해 물었다.
“이 잔 마누라한테 가서 보여주고 내일 다시 가져오면 안 되겠소?”
터줏대감과 퇴직한 교장선생님이 동시에 나에게 애절한 눈빛 협공을 퍼부었다. 그래서 나는 졌다.
“그러세요.”
터줏대감은 컵 위에 소서를 덮고 살살 가게를 나섰다.
다음 날, 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다음 날은 내가 그 컵을 잊기로 결심했다. 설령 아내에게 라떼를 보여주고 싶다는 터줏대감의 얘기가 거짓말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정도의 낭만적인 거짓말이라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날 퇴직한 교장선생님의 불쾌한 부탁도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컵을 완전히 잊고, 일주일 쯤 지났다. 어느 늦은 밤, 구부정하고 느린 걸음으로 터줏대감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 이렇게 늦게 된 이유를 말해주었다. 며칠 동안 몸이 불편해서 나올 수 없었다는 거였다. “이거 우리 집사람이 아주 좋아했어!” 오늘도 그의 목소리는 컸다.
컵을 받아 든 나는 좀 으쓱했다. 그 뒤로 노년의 두 손님은 다시 함께 커피를 마시러 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인근 식당가에서 우연히 그 터줏대감을 만난 적이 있다. 혼자서 식사를 하고 나오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한 손에는 지팡이가 다른 한 손에는 식당의 포장용기가 들려 있었다. 예쁜 것을 좋아하지만 집에 누워 있다는 그의 아내가 떠올랐다.
그의 낭만은 거짓이 아니라는 건 내게는 제법 큰 사건이었다. 그리고 나이 드는 일에 대한 모종의 기대감 같은 게 생겼다. 타인에게 무례한 누군가의 노년에도 순정과 낭만은 있다. 그것들은 뒤섞인 채로 우리에게 온다. 세상은 누추하고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