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인쿠버에서 적응하며 살아가는 법
밴쿠버에서의 겨울은 한국에서 경험한 겨울과 매우 달랐다. 물론 한국의 영토에 비해 100배가량 큰 캐나다의 날씨를 모두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밴쿠버만큼은 한국의 겨울과 사뭇 다르다. 한국의 겨울은 차갑고 눈이 내리지만, 햇빛도 비추고 맑은 날도 많다. 반면, 밴쿠버의 겨울은 11월부터 3월까지 비가 자주 내리고, 흐린 날이 많으며, 해가 짧다. 자연스럽게 긴 밤을 보내야 하는 계절이 찾아온다. 특히 겨울과 초봄에는 비가 많아, 이 긴 어둠과 비에 적응하는 것이 하나의 도전이었다. 멘탈이 약하다면 우울감에 빠지기도 쉬운 환경이다. 아마도 이런 날씨 환경이 이민자들의 적응을 하게 하는 시험대 같은 생각이 든다. 이런 적응 없이는 더 이상 이민 생활은 없을 수도 있다.
긴 겨울밤, 어둠 속에서 살아가기
밴쿠버의 겨울밤은 유난히 길다. 오후 4시만 되어도 어둑어둑해지고, 이른 밤이 시작된다. 처음에는 이런 긴 어둠이 답답하고 우울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하늘에서 빛이 사라진 채 살아가는 기분이랄까. 겨울마다 나는 "생산성 없는 계절"이라고 툴툴댔고, 날씨에 휘둘려 무기력해지곤 했다. 인터넷 서핑으로 시간을 보내곤 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시절의 겨울은 특별한 관심사 없이 잠만 늘어났던 계절이었다.
비 내리는 겨울, 익숙해지는 법
밴쿠버의 겨울비는 가볍게 하루 종일 내리는 경우가 많다. 비가 오는 날인데도 우산을 찾아볼 수도,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우산 없이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비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이곳의 비가 한국에서 경험한 소낙비와는 다르다고 느꼈다. 소낙비가 내려 창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그리웠고, 길거리에 까만 우산, 파란 우산, 형형색색의 우산 행렬이 그리웠다. 비 오는 날 파전에 동동주를 곁들이던 한국의 분위기가 떠올랐다. 그러나 요즘은 가벼운 비뿐만 아니라 우산 없이는 감당하기 힘든 폭우성 비까지 빈번하다.
그래서일까, "레인쿠버(Raincouver)"라는 밴쿠버의 별명이 단순한 애칭인지, 아니면 애교성 애칭인지, 아님 저주 섞인 별칭인지 가끔 헷갈렸다. 차츰 애칭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갔다. 단순히 비가 많은 도시라는 뜻을 넘어, 이곳 사람들의 생활 방식과도 깊이 연결된 이름이 아닐까. 우산을 쓰지 않고 다니는 현지인들을 보면, 그들은 이미 비와 함께 사는 법을 터득한 듯했다.
집 안에서 따뜻한 분위기 만들기
해가 짧아지는 겨울, 자연스럽게 실내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저녁이면 도시는 깊은 잠에 빠진 듯 조용해지고, 마치 멈춰버린 공간에 갇힌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나는 집 안을 따뜻하게 만들기 위해 조명을 바꾸고, 가끔은 집안 전체적인 가구 배치를 바꾸며 분위기를 전환해 보았다. 음악을 틀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며 긴 밤을 견디는 방법을 찾아갔다. 사실, 이민자로서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은 단순히 날씨가 아니라, 이곳의 문화와 삶의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비타민 D와 건강 관리
밴쿠버의 겨울은 햇빛을 거의 볼 수 없을 정도로 흐린 날이 많다. 그래서일까, 현지인들은 햇볕이 드는 날이면 베란다에서 일광욕을 즐겼다. 심지어 여름에는 비키니 차림으로 뒷마당에서 태양을 반긴다. 그들의 모습이 낯설었지만, 점점 이해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비키니를 입은 여자가 가벼운 눈 인사로 지나가는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는데 행인은 여자가 유혹하는지를 알고 실례를 범했다는 한국 이민자의 일화도 있다고 한다. 햇볕이 귀한 이곳에서는 비타민 D 섭취가 필수였다. 특히 백인들에게는 충분한 햇볕에 노출되지 못하면 피부암이 올 수도 있다고 들었다. 나는 피부의 노출보다는 흐린 날이 계속되면 무기력함에 산책을 나갔고, 비 오는 날에는 쇼핑몰에서 시간을 보내며 활력을 찾았다.
또한, 밴쿠버의 나무들은 비가 많아 낮은 땅에서도 쉽게 뿌리를 내릴 수 있다. 하지만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 나무는 비바람에 쉽게 쓰러진다. 때때로 길을 걷다 보면 거대한 나무가 뽑혀 나가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식물을 키우거나 야채를 키울 때에는 양분이 있는 퇴비가 필수이다. 비로 인한 땅의 양분이 많지 않은 까닭이다. 이곳에서 살아가는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이 긴 겨울을 견디려면, 깊고 단단한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을 즐기는 방법 찾기
밴쿠버의 겨울은 춥지는 않지만, 회색빛 하늘과 비가 지속되면서 답답함을 느끼기 쉽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즐길 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환경 탓에 즐길 거리가 다소 방법과 차이가 달라졌을 뿐이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곳곳에서 화려한 불빛 장식을 볼 수 있고, 인근 산에서는 스키나 스노슈잉을 즐길 수도 있다. 물론, 나는 겨울 스포츠와는 거리가 멀다. 아니, 멀기보단 여유가 없이 쉽게 할 수 없는 스포츠라는 것이 변명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밴쿠버에서 겨울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긴 밤을 단순히 견디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리듬을 찾고 조금씩 적응해 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기다려야 할 봄의 도래
밴쿠버의 겨울은 길고 어둡지만, 이 시간이 지나면 결국 봄이 온다. 봄이 오면 도시는 다시 생기를 되찾고, 곳곳에서 벚꽃이 만개한다. 그 긴 겨울을 슬기롭게 보내고 나면, 봄의 따뜻함이 더욱 값지게 느껴진다. 도시 근교에는 골프장이 많다. 한국보다 이용료가 저렴하고 대중화되어 있어, 봄은 즐길 거리가 더 화사한 봄을 맞이할 수 있다. 어쩌면 기나긴 겨울을 보낸 보상의 대가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겨울을 보내면서 알게 되었다. 적응이란 환경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환경 속에서 나만의 방법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밴쿠버의 긴 겨울밤과 끊임없이 내리는 비.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속에서 나만의 리듬을 찾으며 적응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