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땅 캐나다에서 한식으로 건져 올린 나의 적응기
잃어버릴 듯했던 까마득한 시간의 여행을 문득 기억해 낸다. 해외여행을 갈 때면 김치며 고추장을 꼭 챙기던 시절이 있었다. 작은 통에 된장과 간장까지 담아 가방 속에 꾹꾹 눌러 넣으며 고국의 맛을 챙기던 그 마음은, 그저 나의 밥 한 끼를 위로하고자 하는 소박한 바람에서 비롯되었다. 유리병이 깨지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싸고, 옷 사이에 넣으며, 그 모든 것을 마치 어떤 소중한 보물을 지키듯 다뤘던 기억이 선명하다.
외국에서 며칠 머물다 보면 햄버거도, 파스타도 질리게 된다. 결국 찬밥에 김치 한 조각이 가장 큰 위로가 되었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한국 음식을 해외에서 구하는 것이 매우 힘들었고, 모든 것이 낯설고 정보도 지금처럼 풍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한인 마트에는 필요한 재료들이 거의 모두 있다. 냉동창고에는 떡국 떡과 삼계탕, 심지어 핫도그 간식까지 쌓여 있을 정도로 한국의 맛들이 이곳에서 한층 더 가까워졌다.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리움은 언제나 냉동고에 담겨있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냉동실을 가득 채워 놓았다고 해서, 그리움이 사라지거나 적응이 완벽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저 어쩔 수 없이 적응하고, 그리움을 내면으로 눌러 담을 뿐이었다. 어느 날, 문득 ‘한식이 그립다’는 마음이 들 때가 있다. 비 오는 날 어머니가 부쳐주시던 빈대떡, 가마솥에 끓여낸 구수한 누룽지 숭늉, 장독대에서 묵혀낸 묵은지로 끓인 김치찌개의 깊은 맛과 냄새는 언제나 고향의 맛이었다. 그런 기억들이 바로 나를 이곳에, 이방의 땅에 살면서 적응하기 힘들었던 시간들이었다.
이제 이곳 캐나다에 정착한 지도 11년이 훌쩍 지나갔다. 처음 이민 왔을 때 볼 수 없었던 한국 제품들이 이제는 로컬 마트나 코스트코 진열대에서 주인 행세를 하듯 아무렇지 않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민자의 삶에서 한식은 내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어떤 음식은 따라 할 수 있지만, 그 맛을 제대로 재현하기란 쉽지 않다. 특히 추석이 다가오면 그리움이 더욱 커진다. 명절 음식 하나하나에는 사소하지만 빼놓을 수 없는 고유의 맛과 향이 있는데, 그것을 이곳에서 재현할 수 있는 환경은 아쉽게도 없다.
잔치국수나 장터국수를 만들어 보았지만, 뭔가 빠진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 맛은 단순히 재료나 조리법으로 해결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맛을 온전히 느끼려면 그 음식을 먹는 환경이 달라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과 함께 명절의 음식을 나누며 웃고 떠드는 그 소박한 일상이 그리워지기도 했다. 결국, 적응이라는 이름의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의미를 조금씩 내려놓게 되었다. 사춘기 시절의 반항기처럼, 처음엔 적응이 힘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되는 그런 과정이었다.
이곳에서도 여러 종류의 한식을 해 먹을 수는 있다. 된장도, 고춧가루도, 국간장도 다 구할 수 있고, 비슷한 재료로 비슷한 맛을 낼 수는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비슷한’ 맛일 뿐, 진짜의 맛이 아니다. 무엇인가 흉내 낸 듯한 그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진짜가 되려 하지만, 진짜가 아니면 어디까지나 어색하고 부족하다. 묵은지 대신에 신 김치로 삼겹살을 싸 먹으며 "맛있다"는 말을 하지만, 그 속에선 항상 많은 맛이 부족한 느낌을 떨칠 수 없다. 고국에서 먹던 그 묵은지찌개의 깊은 맛은 단순히 재료로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오랜 시간과 기억, 그리고 감정이 함께 배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햄을 샀다가 첫 입에 놀라 뱉어버린 적도 있었다. 한국 햄의 맛과 다를 거라고 예상을 하지 못한 착오이다. 중국 푸드코트에서 사 온 오리훈제는 더했다. 입에 넣기도 전에 강한 향신료 냄새가 입에 들어가기 전 코에서부터 거부했다. 그런 날, 김치전을 부쳐 먹으며 혼자서 소리 없이 웃었다. 결국 돌아오는 건, 내가 좋아하는 맛, 그리운 맛이었다. 그리움이 키운 입맛은 고향의 맛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며 입맛은 변해갔다. 이곳에서의 삶은 점점 익숙해졌고, 적응은 어느 정도 이뤄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득문득 그리운 날이 있다. 어릴 적 어머니의 손맛, 비 오는 날 부엌에서 들리던 지글지글 소리, 숟가락 들고 마주 앉아 나누던 따뜻한 밥 한 끼가 그리운 날이 있다. 이민자의 삶은 어쩌면 그리움과의 타협인 것 같다. 이방의 땅에서 나만의 방식으로 고향의 맛을 찾아가고, 그리움이 밥상을 차리며 시간을 젓가락으로 들게 한다.
오늘도 나는 아내 대신 부엌에 선다. 냉장고에서 신 김치를 꺼내 묵은지 삼아 돼지고기를 썰어 넣고 조심스럽게 불을 켠다. 이 글을 쓰며, 또 한 번 나는 그리움을 끓이며 오늘도 캐나다에서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