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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에서 나를 다시 만났다

이방인의 시간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들

by 김종섭

길고도 짧은 듯, 때로는 짧으면서도 길게 느껴졌던 캐나다 이민의 여정. 그 시간은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이제 이민 생활 적응기를 마무리하는 글을 쓰며 마치 내 삶의 한 페이지를 조용히 접는 듯한 기분이 든다. 물론 앞으로 펼쳐질 삶의 페이지는 여전히 많지만, 지금 이 순간은 내가 이민 초기에 겪었던 낯설고 치열했던 시간, 그리고 그 속에서 조금씩 적응해 온 과정의 한 단락을 정리하는 시점이라 할 수 있다.


처음 밴쿠버 땅을 밟았을 때의 풍경은 아직도 생생하다. 어디에나 맴돌던 낯선 공기, 실내외를 가리지 않고 감돌던 이질적인 기운, 그리고 무엇보다 수많은 이정표와 영어 문장들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던 내 모습. 말은 통하지 않았고, 표정과 몸짓에 의존해야 했던 초반의 일상은 마치 손으로 밥을 먹지 못하고, 세수조차 할 수 없는 답답함과 같았다. 그저 ‘가족을 위해’ 택한 이민길이었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은 어쩌면 ‘진짜 나’를 만나기 위한 여행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른다.


낯선 땅에서의 시작은 결코 쉽지 않았다. 아니, 쉽다는 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험난했다. 한국에서의 경력은 이곳에선 아무 의미도 없었고, 말투, 습관, 생각까지 다시 배워야 했다. 마치 어린아이가 되어 처음부터 다시 살아가야 하는 느낌. 서툰 영어는 구직 활동의 가장 큰 벽이었고, 의료 시스템과 문화 차이, 느린 행정은 매일을 작은 전쟁처럼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마음 깊이 자리하던 한국에 대한 그리움은 점점 짙어졌고, 때로는 '내가 왜 여기까지 왔을까'라는 회의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흔들리던 시간 속에서도 나는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었다. 완벽해지려는 마음은 내려놓고, 실수하고 부딪히며 배우는 법을 익혀야 했다. 특히 내 아이들이 보여준 놀라운 적응력은 내게 큰 위로이자 배움이었다. 아이들은 나보다 훨씬 빠르게 이곳에 녹아들었고, 그 모습은 오히려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적응’이란 단지 환경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함께 스며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 것도 그때쯤이었다.


시간은 서서히 이민자의 시야를 넓혀 주었다. 캐나다 사회의 다양성과 포용력은 내게 익숙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일깨워주었고, ‘살아남는 것’에서 ‘살아가는 것’으로 나의 삶의 태도도 변해갔다. 그렇게 나의 시선은 점점 바깥보다는 안쪽으로 향했고, 나는 내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더 자주 가지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늘 바쁘고 조급하게 살았다. 하지만 캐나다에서의 삶은 속도를 늦추게 만들었다. 경쟁보다 조화를, 소유보다 존재를 더 자주 생각하게 했고, 무엇보다도 타인의 시선이 아닌 나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게 해 주었다. 비 내리는 밴쿠버의 겨울밤은 나에게 성찰의 시간을 선물했고, 여름날의 햇살은 다시 나아갈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이민이라는 커다란 전환점은 나에게 단지 새로운 환경을 제공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다시 만나는 여정이었다. 잊고 지냈던 내 모습, 미처 알지 못했던 나의 가능성을 마주하며 살아왔던 이 시간은, 그 어떤 경험보다 값지고 소중했다. 이제 나는 한국에 대한 그리움과 캐나다에서의 평온함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가며, 이민자로서의 삶을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어느 순간보다 넓은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스스로를 인정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는 점이다. 내려놓고 수용하는 것에서 비로소 평온이 시작된다는 것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이 글이 누군가에게 교훈이 되기를 바라진 않는다. 다만, 낯선 곳에서 살아가며 때로는 길을 잃고, 때로는 삶의 속도를 조절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조용히 닿을 수 있다면 좋겠다. 나의 이민 이야기가 누군가의 하루에 작은 온기가 될 수 있기를, 그래서 각자의 여정 속에서 자신만의 빛을 발견해 가기를 마음으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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