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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에서]여름 숲에서 만난 익숙한 산딸기

낯선 곳에서 마주한 산딸기는 고향의 기억들을 만들어 놓았다

by 김종섭

계절은 산책길을 매일 새롭게 만든다. 캐나다의 숲에서 만난 고사리와 산딸기, 같은 익숙한 식물들은 고향의 정취를 떠올리게 한다. 이 낯선 땅에서 자연은 조용한 위로와 회상의 순간을 선물한다.

요즘의 산책길은 매일 새롭게 느껴진다. 매일 걷는 길이지만 계절은 하루가 다르게 모습을 바꾸어 놓는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고사리와 고비를 채취하던 숲은 어느새 무성하게 자라나 산책로를 감싸고 있다. 처음엔 몰라봤던 고사리의 어린잎도 이젠 풍성하게 자라 눈에 띄고, 고비 역시 숲의 한 장면이 되어 주위를 장식한다. 자라는 식물들을 바라보는 일은 어느덧 내게 애틋한 관심의 기쁨이 되었다.

늘 걷던 길인데도, 요즘 따라 길이 좁아진 듯한 느낌이 든다. 아마도 숲의 풀들과 나무들이 부쩍 자라 길 가까이까지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짙어진 녹음은 풍경뿐만 아니라, 내 감각까지도 더욱 깊고 진하게 만들어준다.

햇살이 뜨거운 날에도 숲길은 여전히 시원하다. 나무 사이로 흐르는 바람은 부드럽고, 잎 사이로 드리운 그늘은 뜨거운 햇살을 막아주며 내 걸음에 쉼을 더한다. 이런 순간들은 이민자의 낯선 일상 속에서 느끼는, 작지만 확실한 기쁨이고 활력 에너지이다.

산책길 옆 덤불에서는 블랙베리가 익어가고 있다. 처음엔 빨갛던 열매가 시간이 흐르며 검게 변하고, 완전히 익으면 손끝에 닿기만 해도 으스러질 듯 부드럽다. 입에 넣으면 퍼지는 새콤달콤한 맛은 한여름 자연이 내게 건네는 간식 같은 기쁨이다. 아직 익지 않은 붉은 열매는 시큼하고 떫지만, 그것조차 자연이 내어준 선물이라 생각하며 감사히 일찍 맛보았다.

덤불 사이에는 주황빛 열매도 눈에 띈다. 연어의 속살을 닮아 '연어딸기(Salmonberry)'라 불리는 듯하다. 이 열매는 블랙베리보다 밝은 색을 띠며, 또 다른 풍미와 멋을 전한다. 산 딸기 몇 개만 따도 손바닥이 금세 가득 찰 만큼 풍성하다. 하지만 가시 많은 덤불 속에서 딸기를 따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손이 닿는 만큼만 허락되기에, 이미 누군가의 손길이 닿은 자리는 대부분 비어 있다. 자연은 조용하지만 분명한 방식으로 공평함을 만들어 놓았다.

이맘때 산딸기를 따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아, 벌써 한 해의 절반이 지났구나.’
산딸기는 자연이 건네는 조용한 시계추 같다. 말없이 계절의 흐름을 알리고, 나로 하여금 지난 시간을 돌아보게 만든다. 빠르게 지나간 시간 속에서 나는 무엇을 했는지, 괜스레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한다.

캐나다의 숲은 한국의 산과 닮은 점이 많다. 고사리나 산딸기처럼 익숙한 식물들이 있어 그런지, 이 낯선 땅의 자연이 때론 고향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익숙한 것을 발견했을 때의 안도감, 그리고 그것이 주는 정서적 친근함은 내가 이곳에 더 깊이 스며들도록 만든다.

여기서는 숲뿐 아니라 공원, 들판, 길가에서도 블랙베리 덤불을 쉽게 볼 수 있다. 가시가 많고 번식력이 강해 때로는 골칫거리 취급을 받기도 하지만, 그 안에도 여전히 반짝이는 생명이 자란다. 작은 꽃이 피고 열매로 이어지는 이 자연의 순환은 우리가 한 번쯤 걸음을 멈추고 눈길을 줄 만한 아름다움이다.

이처럼 낯선 곳에서 우연히 마주친 익숙한 자연은 내 삶에 잔잔한 위로를 건넨다. 하루하루가 새롭고, 때로는 막막하기도 한 이민자의 삶 속에서 나무 한 그루, 열매 하나가 건네는 사소한 기척이 어느 날 문득 마음을 적신다. 이 숲에서의 산책은 단지 걷는 일이 아니라, 이 낯선 땅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되돌아보게 하는 작은 사건이 되어가기도 했다. 이 또한, 내가 이곳에서 마주치는 특별한 순간이다.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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