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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에서]직업을 묻지 않는 사람들

사람 자체를 바라보는 문화에서 내가 배운 태도

by 김종섭

사람을 처음 만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묻는다. 이름, 나이, 사는 곳, 그리고 빠지지 않는 질문.

“무슨 일 하세요?”


이건 한국 사회에선 거의 의례적인 인사처럼 여겨진다. 특별한 인연이 아닐지라도, 상대를 파악하기 위한 질문지가 머릿속에 자동으로 떠오른다.


나 역시 그랬다. 스쳐가는 인연에게도 괜히 궁금증이 생겼고, 상대의 정보를 통해 대화의 물꼬를 틀곤 했다. 그런 나를 아내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걸 꼭 알아야 돼요?”

우리는 그런 질문 하나로도 성향이 많이 다름을 느꼈다.


이민 초기, 나는 여전히 한국식 질문을 품고 캐나다에 왔다.

“무슨 일 하세요?”, “어디서 일하세요?”

이건 이름보다 먼저 나오는 질문이었다.

직업은 상대를 파악하는 가장 빠른 기준이었고, 때론 그 사람의 가치를 짐작하는 척도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캐나다는 달랐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이웃, 산책길에서 만난 강아지 주인 누구도 내게 직업을 묻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주말엔 뭐 하세요?”

“어떤 걸 좋아하세요?”


처음엔 조금 당황스러웠다.

직업도, 이름도 모르는데 어떻게 저런 질문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 물음에는 진짜 관심이 담겨 있었다. 직업을 통해 나를 가늠하려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알고 싶어 하는 태도였다. 그 순간 묘한 친밀감이 느껴졌다.


한국에서는 직업이 사람을 설명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었다. 이력서 맨 위에 이름, 직장, 직함이 적히듯, 사람은 곧 타이틀로 설명되곤 했다. 좋은 직업을 가졌다는 이유로 사람이 달라 보였고, 기대했던 직업이 아니면 괜히 거리감이 생겼다. 직업이 마치 사람의 무게를 정하는 저울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예비군 훈련 때 생각이 난다. 모두가 군복을 입고 앉아 있을 땐 평등해 보였다. 직업도 계급도 없었다. 하지만 훈련이 끝나고 사복으로 갈아입는 순간, 분위기가 달라졌다.

사람들은 옷으로, 말투로, 직업으로 다시 자신을 설명했다.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모두가 유니폼을 입고 살아간다면 세상은 조금 더 평등할 수도 있겠구나.’


이곳 캐나다에선 ‘무엇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더 중요해 보였다.

그 사람이 가진 말투, 태도, 속도, 생활 방식 같은 것들이 중심이었다. 직업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 사람을 말해주는 기준이었다.


지금 사는 아파트에서도 마찬가지다. 10년 넘게 지낸 이웃들이 있지만, 한 번도 우리 부부의 직업을 묻지 않았다. 나는 몇몇의 직업을 안다. 한국에서처럼 먼저 물어봤기 때문이다.


이민 초기에 한 젊은 친구에게 직업을 물은 적이 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야간에 빌딩 주차장에서 일해요.”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왜 저렇게 솔직하지? 그냥 "회사 다닌다"라고 해도 되잖아.’


나였다면 얼버무렸을 것이다. 그 순간 내 안에 깊숙이 박혀 있던 ‘직업의 귀천’이라는 개념이 드러났다. 그 젊은이는 당당했고, 나는 부끄러웠다. 그때부터 비로소 이 나라의 문화가 직업에 우열을 두지 않는다는 걸 이해하기 시작했다.


돌아보면 내 말투와 질문 습관에는 한국이라는 문화가 깊게 배어 있었다.

직업을 묻고, 학벌을 묻고, 사는 곳을 통해 상대를 가늠하려 했던 익숙함. 그게 낯선 땅에서 제일 먼저 부딪힌 내 모습이었다.


이제는 나도 그 질문을 꺼내지 않는다. 상대가 먼저 말하지 않는 한, 묻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직업이 아닌 그 사람의 하루, 주말의 풍경, 웃음의 깊이를 보며

조심스럽게 관계를 시작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그러다 가끔 한국인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묻는다.

“무슨 일 하세요?”

그리고 그 순간 피식 웃는다. 몸에 밴 문화는 쉽게 사라지지 않지만, 그래도 나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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